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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29. 2020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차키스

믿음은 풍선 같은 것

삶과 죽음, 빛과 어둠, 논리와 감정. 서양문학은 이성과 논리를 대변하는 아폴론과 본능과 감정을 대표하는 디오니소스의 대립 구조를 다루는 글이 많습니다. 빛이 있으니 어둠이 있고, 삶은 죽음 앞에서 생동합니다. 이러한 대립 구조는 읽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 오그레는 조르바를 통해 본능적인 욕구에 충만한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조르바는 오그레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죠. 오그레는 왜 조르바를 만나고 싶었을까요? 자신에게 부족한 기질을 보충하고 싶은 숨겨져 있는 본능적 욕구 아닐까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마다 책이 주는 의미가 매번 다르게 느껴집니다. 나름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살았을 때에는 – 생각도 몸도 젊은 시절이었죠 – 오그레와 조르바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오그레를 추구하면서도, 몸은 조르바를 추구하는 식이죠. 오그레와 조르바 그 누구에게도 동조할 수 없었던 나는 자신의 이유로 발현되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읽는 내내 이 책을 읽지 않을 자유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찾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내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다른 정열에 사로 잡혀 나만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일까요? 이상(理想)이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내가 추구했던 무엇과 그 무엇을 얻기 위한 선택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무엇에 치중한 삶은 나의 무엇이 아닌, 무엇의 나로 내 자신을 종속시켰습니다. 신재호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부처가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고. 이놈의 노예근성을 어찌할까요? 인생의 판은 커졌지만 제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나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생각합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게 됩니다. 무엇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하나의 무엇을 정복하고 다른 무엇으로 넘어갈 때, 그 무엇 위에서 자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위안하면서도 불안할 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지구 건너편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시점입니다. 무의식에 숨겨 둔 자신의 반쪽에 대한 욕구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림자만 보고도 만족해하는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조르바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을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골방에 쳐 박혀 있습니다. 일상에 묻혀 자신의 욕구에는 회피로 일관합니다. 다시 삶의 진창에 빠져 허덕이다가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부르짖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오그레와 조르바처럼 다리에 줄을 묶고 긴 여행을 떠나면 좋을 텐데요. 날마다 조르바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구를 충적시키는 과정입니다. 욕구의 충족 여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이 결정되죠. 내가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는 것은 내 안의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하고 어떤 욕구 때문인지 자신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단순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면 일상이 힘들어집니다. 욕구와 감정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조르바를 바라보면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인간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아이처럼 행동하는 조르바입니다. 하지만 화자 오그레의 욕구 표출 방식은 어색하고 불안합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카잔차키스는 이 지점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조르바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춤을 추면서 상대와 소통하는 쾌감을 경험합니다. 경험은 누적되고 춤은 자신의 언어로 자리 잡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합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행동이 다릅니다.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직결되어 있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소통하는 조르바는 그토록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주위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자신을 욕구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거나 주위를 모두 가짜 깃털로 꾸미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플 때를 생각해 보세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주변의 시선과 관계없이 안으로만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신앙에 대한 믿음, 한 번도 온전히 누군가를 믿은 적이 있었을까요? ‘세상 믿을 게 없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과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믿음,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라는 믿음,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믿음, 나는 내일도 존재할 거라는 믿음, 온통 믿고 사는 것뿐입니다. 인간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걷고자 하는 욕구를 뇌와 신경 그리고 근육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걸을 수 있습니다.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넘어지고 일어서서 다시 걷는 과정을 수 없이 거쳤습니다. 걷는 행위에 대한 나의 확신이 쌓여서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 역시 감각에 대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믿고 사는 것 투성이면서도 어딘가 아픈 사람인양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믿음은 풍선 같은 것이지요. 두터운 현실의 벽 앞에 잠시 믿음이라는 풍선이 쪼그라들었을 뿐, 내가 쌓아온 역사마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헛된 사람으로 만들었던 내 안의 왜곡을 온전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왜곡을 벗은 온전한 나를 마주 보고 싶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마주 보기에는 동행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조르바 같은 대상은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여러 번 조르바를 만났을 겁니다. 골방에 내 자신을 가두고 회피로 일관했기에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별이 빛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어두운 밤을 인정해야 합니다. 별이라는 이상(理想), 빛이라는 무엇만 추구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별에 함몰되고 빛에 눈이 멀어 버립니다. 이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 주어야지요. 인정하고 지지하면 자신만의 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그레는 헤어지면서 조르바에게 말합니다.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겁니다.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 구역질이 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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