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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31. 2020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아직이라고 말했잖아. 그다음이 문제야. 그걸  잊지 말라고.

<모래시계>에서 우석(박상원)이 ‘다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태수(최민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살인범 태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검사는 절친 우석이다. 혜린(고현정)은 태수의 어머니가 묻힌 지리산 어느 자락에 태수를 보내주면서 우석에게 묻는다.


“그런데 꼭 보내야 했어?”

“아직이라고 말했잖아. 아직은 몰라.”


이어지는 우석의 독백은 차라리 다짐이다.


‘그럼 언제쯤이냐고 친구는 묻는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먼저 간 친구는 말했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말라고.’


모래시계 엔딩 이후로 스무 해가 넘게 나는 '다음이 문제'라는 명제를 끌어안고 살았다. 하지만 다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다음은 강물이 흐르듯 시간이 흐름을 타고 다가올 뿐이었다. 내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다음의 자리는 눈먼 자리였다. 미디어에 나오는 풍성한 식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것, 식탁 모퉁이라도 끼어들고 사는 것으로 그 자리가 채워졌다.


풍성한 식탁을 차리기까지의 마뜩지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 구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우석이 말한 '다음'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우석은 우리 사회의 불의를 의미하는 태수를 끊어내고도 다가올 다음에 대해 아직은 모른다며 자신하지 못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좁혀 내 안의 부끄러움을 쳐내는 일 역시 한 순간에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의 드리워진 태수의 그림자에 사형을 언도하기는커녕 관심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을 기약하며 현실의 문제를 회피했다. 나에게 다음은 그렇게 헛것이 되었다. 헛것을 삶의 화두로 삼은 나의 다음은 헛것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태수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동화 같던 어린왕자의 마지막도 이러했을까?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의 눈을 통해 소유에 눈이 멀어 정작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반추했다. 특히 곱 번째 별 지구에는 권력욕 소유욕 지식욕에 취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어린왕자 장미꽃 한 송이와 무릎 높이화산 세 개밖에 모르던 자신을 점점 초라하게 여겼다. 길들여지며 깊어지는 관계의 다른 한쪽에서 세상 물정에 길들여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린왕자가 취한 최후의 선택은 가히 충격적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서 나는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눈물 두어 방울 떨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술잔이, 그 눈물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런 의식이라도 있어야 내 나약한 의지를 돌려세워 나를 채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내 안의 태수를 죽여 보았느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보았느냐. 아니 내 안의 죽여야 할 태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묻고 싶었다. 내 안의 태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태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우리가 분한 줄 모르는 것이거나 불의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석대는 내 안의 일그러진 자기 자신이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석대의 왕국이었던 시골 학교의 모순은 우리가 서 있는 현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진창에 짓이겨진 다음에 또렷하게 드러나는 삶의 일부다. 세상을 바꾸자는 외침 안에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안받침 되어야 한다. 자신을 향하는 따뜻한 시선을 거두고, 헛것의 반복이 가져오는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한사코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뤄내야 할 몫이다. 눈물 두방울은 내 안의 태수를 발견하고, 석대를 죽인 이후에 흘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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