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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Nov 05. 2020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우면 지울수록 더욱 드러난다



맨 처음 이 세상에는 이름(言)이 없었다. 말은 소리였고 울부짖음이어서 무기나 밥처럼 몸에 붙어있던 몸짓과 같았다. 살림이 늘고 목숨의 갈래들이 퍼지자 이것저것에 이름이 붙었다. 말이 늘어나서 세상에 넘쳐나자 사람들은 이름으로 세상을 나누고 칼과 활을 들고 싸웠다. 다름을 표현했던 이름은 울타리 밖은 틀린 것으로 치부했고, 사람 또한 빈천과 계급으로 구분 지었다. 말은 허공으로 흘러 바람을 타고 다녔다.

말(馬) 또한 이름이 필요 없었다. 벌판을 무리 지어 달리는 네 발 달린 짐승은 사람을 등에 태우면서부터 말이 되었다. 말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르지만 그것은 앞에 펼쳐진 땅에 다시 닿고자 함이지 바람에 의지해 허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앞뒤 네 발을 땅이 온전히 받혀주기에 말은 앞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말을 만나 시간을 앞질러서, 시간을 이끌면서 달렸다.

소통의 수단이었던 말(言)은 그 자체로 개별적 존재다.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내부를 강화하고 영역을 키워간다. 말은 말을 낳고 글자는 글자를 키우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은 넓어졌다. 말이 그어놓은 금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금을 넓히는 과정은 눈을 뜨고 보기 힘든 폭력을 수반했다. 말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같은 이름 아래서 죽고 또 죽게 만들었다. 목숨이 있고 형체가 없는 것들과 형체가 없고 목숨이 있는 것들은 어느새 목숨도 없고 형체도 없는 것에 휘둘렸다.

말(馬)은 관계적 존재다. 관계적 존재는 만남으로써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속성을 변질시키지 않는다. 말은 달릴 뿐이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 나하를 사이에 둔 초(草)와 단(旦)은 각각 야만과 문명을 상징하는 제국이다. ‘제국’은 거대하게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실재가 아니다. 개별적 존재인 말(言)에 근거한 제국 역시 스스로를 키워간다. 말(言)은 초에게는 헛것이고, 단에게는 신화다. 초는 말에 홀려서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것을 두려워한다. 서물(書物)로 세상을 배우지 않도록 단속하고, 말에 의지해 세워진 돌무더기를 파괴한다. 옆 나라의 돌무더기도 마찬가지다. 단은 사람의 상상 속에 실재를 귀하게 여겼고, 글자들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초는 돌무더기라는 헛것이 빠르게 번지는 것을 경계했고, 단은 그들의 상상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을 한탄했다. 경계와 한탄은 제각기 자신들의 체제를 강요하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초와 단은 결국 충돌한다. 그 사이에서 민중은 수많은 피를 흘렸다. 야만과 문명은 이름만 다른 쌍둥이 형제였다. 초는 돌무더기라는 헛것을 치우려 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초원에 보이지 않는 돌무더기가 들어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은 신화를 이루기 위해 돌무더기를 세웠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끝은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부왕의 뜻을 받들어 단을 공격한 초의 왕 표(猋)는 폐허로 변한 돌무더기 위에 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아지랑이처럼 뒤섞인 초와 단의 초원을 바라본다. 돌무더기는 지울수록 더욱 드러나는 것인가?

그 자리에 작가 김훈이 서 있다. 그 순간 노 작가의 눈에 비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광활한 초원을 말들이 시원하게 내달린다. 자해(自害)로 이빨을 빼서 입에 물린 재갈을 벗어던지고 다시 초원을 달리는 말. 그렇게 한없이 달리는 말. 말(馬)의 저항을 통해 헛된 말(言)에 휘둘린 세상을 깨우려는 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말) 삼 년 전 출간된 김훈의 <공터에서>  표지에는 말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이름이 마(馬) 차세일뿐 달리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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