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Nov 09. 2020

새의 선물, 은희경

삶에는 타의가 없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진희는 늙은 앵무새를 만났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진희라고 합니다."
"눈이 스미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꿰뚫는 눈이다. 허나 눈물이 없구나."

늙은 앵무새는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묻는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다르더냐?"
"세상은 보이는 대로 살아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대로 바라보지 않기 위한 방도였더냐?"
"엄마가 죽고 외할머니 슬하에서 천덕꾸러기로 사는 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어요. 세 수, 네 수를 내다봐야 했습니다."
"내다보니 보이더냐?"
"최소한 마지막으로 선택받는 일은 없게 했습니다. 원 없이 매달렸고 그게 안되면 가차 없이 쳐냈습니다."

진희는 감정을 억제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기쁜 일에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에도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다. 감정에 젖기 전에 그 너머의 일들이 먼저 보였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내 몸속에 물기로 남아 있는 삶의 환상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버리기 위한 눈물이어야 했다.

늙은 앵무새는 부드러운 눈빛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사람들이 너를 영악하다고 보질 않더냐?"
"제가 어리니까 다들 허물없이 대해주었습니다."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열두 살입니다."
"열두 살이라…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는 걸 남들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만한 나이구나."
"저는 제 자신도 그걸 잊고자 했습니다."
"거기까지..."

그렇게 말하며 진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앵무새의 눈에서는 그대로 불꽃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서른일곱이 된 진희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겠느냐?
"그들 속에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중은 현명하기에 결코 속일 수 없다."

"일은 당면해야 알지 않겠습니까."


열두 살 이후 진희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삶의 이면을 경험한 진희에게 더 이상 새로움은 없었다. 경탄과 경악도 없었다. 삶에 대한 냉소는 진희에게서 기대라는 단어를 지웠버렸다. 기대가 지워진 자리에 향유(享有)라는 단어가 설 곳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진희는 쪼개고 나누고 분석하는 언어로 무장했었다. 비바람처럼 매서운 언어였다. 삶의 이면에서 확인한 절망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둘만큼 지독해야 했다. 삶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타의가 있지 않던가. 서른일곱 진희가 될 때까지 끌어안고 지켜온 언어다.


하지만 서른일곱이 된 진희에게 당면해서도 알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믿고 사는 세상이 그랬다. 나 자신만 믿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는 일은 다반사였다. 사랑은 더했다. 어느 노부부의 사랑처럼 사랑은 분석이라는 언어가 먹히지 않았다. 수많은 배반과 아픔 속에서 고목이 되었을 터인데... 진희는 고목이지만 여전히 풍성하게 단풍잎을 피워내는 그들을 꼼짝하지 않고 응시했다. 진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면이었다. 진희는 자신의 언어 중에 고목의 사랑을 설명할 단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진희 안에 가득한 냉소의 언어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순간 진희가 경험한 것은 언어의 죽음이었다. 자신이 터득한 언어는 고목의 높은 곳에 자리한 가지처럼 삶을 메마르게 했다. 그들은 진희에게 언어의 부활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려 나를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동을 인정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울고 웃는 것이었다. 삶에는 타의가 없었다. 광진테라 아줌마의 흐느낌도, 장군이 엄마의 억척도, 이모의 변덕도, 할머니의 너그러움도 생생하게 만질 수 있는 현실로 존재하기에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진희는 자신을 꼬옥 앉아 주고 싶었다.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기에 방법을 몰랐다. 때마침 윗 면이 푹 꺼진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베개를 꼭 안은 진희는 방금 자신의 턱에서 미끄러져 베개를 적시는 눈물 궤적을 고스란히 바라보았다. 그 눈물이 마음속으로 흘러 어린 진희의 눈물이 되었을 때 마음에 구김살 하나가 펴지는 느낌이었다. 차마 울지 못했던 열 두살 진희를 위해 그 날은 흐르는 눈물을 탓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