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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Nov 13. 2020

은교, 박범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알아가는 자유


한동안 은교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은교를 만나면서 ‘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생각한다. 키스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하얀 신작로를 따라 땅 끝까지 가고 싶다. 그 이상도 거리낌 없을 것 같다. 은교를 몰랐던 일상은 ‘해도 된다’와 ‘해서는 안 된다’, ‘가면 된다’와 ‘가면 안 된다’ 사이에서 헛돌았다. ‘하고 싶다’는 내면의 욕망은 어느새 사라진지 오래다. 어쩌다 하고 싶은 것은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주입된 욕구를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고 있다면 나는 슬프게 무지한 멍청이다.

은교는 말했다.
“하고 싶으시면요, 키스……. 하셔도 돼요…….."

‘하고 싶다’와 ‘해도 된다’의 간극을 생각해 본다. ‘하고 싶으시면’과 ‘하셔도 돼요’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한 문장으로 붙어 있기에 쉽게 생각했는데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거리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쉽지 않다. 나아가고 싶은 수많은 길이 있다. 하지만 길이 있다고 다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고 싶던 길은 한사코 버려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일흔이 다 되어 찾아온 내밀한 욕망, 적요에게 은교는 걸어야 하는 길일까? 버려야 하는 길일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젊음이 소진되고 욕구가 사라진 인간에게 은교는 무엇일까? 은교는 ‘해도 된다’와 ‘해서는 안 된다’ 사이에서 헛도는 허망함이 아니다. ‘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이다. 일상에서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알았더라도 한사코 버려야 했기에 가슴 아픈 감정이다.

시인 적요는 소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언덕 집도 늙은 소나무들에 끌려서 들어왔다. 그건 헛된 바람이었다. 소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을 평생 체제의 억압에 맡겨 놓고, 다만 소나무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소나무처럼 ‘살고 싶다’와 소나무가 ‘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다른 얘기를 같은 것으로 바랐던 자신이 허망하다. 소나무처럼 살지 못해 아프고, 소나무 흉내를 내며 가질 수 없는 결개를 동여매고 살아야 하기에 또 아프다. 소나무 그늘이 더듬던 유리창의 흰 살. 적요는 버렸다 생각했던 내밀한 욕망의 그림자를 따라가 본다. 소나무 그늘이 유리창의 흰 살을 더듬듯, 자신 내면의 그림자가 유리창을 닦는 은교를 더듬어 가는 것을 바라본다. 내 안의 숨겨진 치명적 욕구. 관능적이다.

시대를 앞질러 견인했던 적요의 시는 세상의 담론이 되고 인간적인 눈물이 되었다. 시에 담긴 ‘적요’는 함성보다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쌓아 올린 성과는 자신이 그리워한 것과는 거리가 먼 ‘마지못한’ 선택에 불과했다. 그가 노래한 세상, 시대 그리고 역사는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고, 시인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유폐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은교를 향한 사랑은 고목에서 피어난 새싹이었다. 자신의 이유로 발견한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알아가는, 자신의 그리움을 채워가는 자유였다. 적요의 사랑은 자신의 이유(自由)였기에 관능과 욕망마저 자유롭게 했다. 적요에게 은교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나와서 만난 시리게 푸르른 하늘이었다.

<은교>를 읽으면서, 일흔의 적요가 제 안에 품어오던 어떤 '처녀'를 소녀 은교를 통해 다시 발견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죽음 앞에 생동하는 삶을 생각했다. 클림트가 그린 <삶과 죽음>을 떠올렸다. 신기하게 죽음 앞에서 생동하는 삶은 은교가 아니었다. 은교를 만나고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 적요의 삶이었다. 은교를 통해 경험한 본능의 해방, 싱싱한 행복에 감동하는 적요였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서 적요가 떠올린 은교의 모습은 관능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이삿짐에 끼여 두 동생을 양팔로 싸안고 있는 일상적 삶에 깃든 모습이었다.

현실이 힘들고 일상에 지치면 지금은 과정일 뿐이라고 내 스스로 위로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궁극의 지점에서 필요한 과정이겠지 생각했다. 일흔의 적요는 죽음을 삶의 해체이며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궁극이라는 지점은 과연 존재할까? 나는 과연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아마 굴곡 많은 어느 계절의 한 지점일 것이다. 시리고 아픈 것은 지어야 할 매듭의 아퀴 자국 일 것이다. 시인 적요는 은교를 ‘사랑하고 싶다’를 넘어 ‘사랑했다’고 외쳤다. ‘하고 싶다’와 ‘했다’라는 영겁의 간극을 뛰어넘고, 먹물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어둠을 걷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마음에서 발까지의 거리라고 했던가. 적요의 사랑의 방향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기에 그 거리를 거둬내고 ‘사랑했다’ 말하는 적요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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