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 래춘 씨

쉰다섯 래춘 씨_01

by 이봄


시집 한 권을 꺼내 들고서 읽는 둥 마는 둥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꽃과 나비와 향기로운 바람, 하늘과 구름과 점점이 박힌 고추잠자리.... 갈피마다 들어찬 말들은 예뻤고 향기로웠다. 발을 딛고 선 이 자리가 이렇듯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실과 시가 주는 괴리감이 잠시 우울을 불렀지만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떨어냈다.

"누구나 다 그럴 거야? 어디 나만 그렇겠어.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시인은 더 곱고 예쁜 말들을 불러내어 문장을 만들고, 소설가는 마을을 그리고 세상을 꿈꾸는 거겠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다고 해서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던 우울한 생각이 쉽사리 떨어지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종일 생각에 빠져 허우적일 수만은 없어서 시집을 덮으려고 했을 때, 책갈피에 꽂아두었던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난 메모지였다. 메모지에 적힌 말은 간단했고 유치했다. 십 대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한 말이 까맣게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워낙 빼곡히 들어찬 말이라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면 분명 하트를 감싸고도는 한 줄의 말만 눈에 들어왔을 터였다.

"래춘이는 은경이를 사랑해♡"

누가 알아볼까 싶어서 더욱 빼곡하게 덧씌워진 말은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거야 하고 지레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짐작할 뿐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림으로 얽히고설킨 말들이 까만 하트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은 그랬다. 주문전화도 뜸해서 배달을 나갈 일도 없었고, 일찌감치 발걸음이 끊긴 평일이라서 가게에는 졸음 반, 지루함이 반을 채우고 있었다. 늦은 새벽까지 불을 밝혀야만 했으므로 의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뒤적뒤적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들고는 테이블에 앉아 침을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편지처럼 시간을 죽였고, 그녀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는 웃음소리 하나에

"은경아 사랑해"

한 문장만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눌러썼다. 그렇게 눌러쓴 말이 쌓여 마침내 까맣게 하트 하나를 만들었을 때,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제야 길고 지루했던 하루 일과는 끝을 맺었다.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고 생각한다는 건 마치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예쁜 말들과 다름이 없었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파란 하늘엔 흰구름이 그림처럼 떠가고 덩달아 산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는 거였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범벅이 된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을 때, 때마침 불어 가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까르르 자지러지는 아이들과 먼지가 일도록 불어 가는 바람이 어찌나 좋던지 남자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오래된 메모지 한 장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웃었다. 유치함이 좋아서 웃었고, 어쩌면 살짝 부끄러워서 또 웃었다. 인생 황혼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낯을 붉히고야 마는 그녀가 있어서 좋았다. 심장은 여전히 콩닥거렸고 생각은 어느새 꽃길을 지나 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달려가던 소년의 등 뒤에는 신문지에 둘둘 말린 백합꽃이 한 다발 매달려 있었고, 정작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의 난감한 마음이 좋았다.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하고 서성대기만 하던 부끄러움은 그녀를 향한 소년의 전부였다. 부르지도 못하고, 쉽사리 떠나지도 못하는 마음이 풋사과처럼 시었지만, 사랑고백에 어울리지도 않는 백합꽃을 낫으로 베던 마음이야 신문지면 어떻고, 백합이면 또 어떠랴 싶었다. 마당 가득 핀 꽃이 하필 백합꽃이었을 뿐이었다. 달 밝은 밤에 핀 꽃은 향기를 더했고, 그 향기는 또 얼마나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는지 모른다. 이른 잠에서 깨어 마당을 서성이다가 꽃향기에 취했던 소년은 오직 소녀에게 예쁜 꽃다발 하나를 전해주고 싶었다. 낫으로 베어내던 백합꽃은 그래서 희지만 붉은 장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권 되지도 않는 책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흔한 책장도 없었고 책상 위에 올려진 책꽂이도 없었다. 농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허름한 옷장의 한 칸을 비워 몇 권의 책과 둘둘 말아둔 종이 뭉치를 함께 꽂아두고 있었다. 소설책이 두어 권에다 수필집이 또 그만큼 있었고, 그녀에게 선물로 받은 시집이 한 권 있었다. 거기다 어디에 분류를 해야 하는지도 애매한 성격의 책도 서너 권 있었는데, 그 애매한 얼굴로 비좁은 자리를 꿰차고 앉은 녀석들은 자기 개발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명언집이라고 해야 할까 가 못내 애매했지만, 애초에 남자가 좋아하는 부류의 책도 아니다. 가뜩이나 그랬던 터여서 먼지는 더욱 두텁게 쌓였고, 며칠 전 옷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다가 '뭐야? 이런 책도 다 있었네' 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처음 보는 책이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싱글벙글 환한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낯선 얼굴로 웃고 있는 녀석이 어찌나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로 다가섰는지 남자는 움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 거였다. 몇 권 되지도 않는 책에서 처음 보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이런 책도 있었구나 하는 얘기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가끔 얼굴을 보게 되는 어린 조카에게 '아민이는 책 좋아하니?' 묻는다던가, 아니면 책 많이 읽으라는 잔소리를 빼먹지 않고 늘어놓으면서, 정작 본인은 집에 어떤 책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고 하는 뻔뻔함이 숨어있는 꼴이라서 그랬다. 미안했다.

남자가 처음부터 책을 멀리하지는 않았다. 한때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 때도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손에 책을 쥐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책과 멀어지더니만, 일 년에 한두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요즘이 돼 버렸다. 생각해 보면 마음에서 여유가 사라진 시기와 책을 가까이하지 못한 때가 겹쳤다. 돈을 트럭으로 쌓아놓고 사는 것과 하릴없는 시간이 산더미로 쌓여야만 여유로운 것도 아닌데, 마음에서 조바심이 일고 몸짓은 늘 종종걸음으로 부산을 떨어야만 그나마 불안함이 덜해질 때부터, 좀처럼 책을 읽을 여유가 사라졌다. 여유가 사라진 마음은 단 몇 문장의 글도 눈에 담지 못했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두리뭉실 넘어가는 말들은 가슴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몇 년을 콧구멍만 한 방에서 동거를 했음에도 초면인 녀석과 통성명을 해야만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거였다. 사람은 못해도 죽기 전까지 서너 수레의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말을 종종 주절거렸던 남자였다. 서너 수레의 양은 몰라도 한 수레쯤은 넉넉히 싣고도 남을 책은 읽었구나 하는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살던 남자였지만, 산다는 것은 그 알량한 허영심에 허락된 마음 한 조각마저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로 거리로 나앉은 것처럼 남자는 빈털터리였다. 비를 가려주거나 바람을 막아줄 것도 하나 없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꼴이었다. 낱말 하나, 문장 한 줄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집게발만 유난히 큰 소라게는 여느 게들처럼 단단한 껍데기도 없었다. 오직 믿는 구석이라고는 커다란 집게발이 고작이었다. 몸에서 집게발 하나를 떼어내면 몸뚱이의 절반은 이미 없는 거였다. 머리며 몸통에다 꼬리까지 다 더해봤자 떨어져 나간 집게발 하나만 못했다. 그런 기형적인 몸뚱이를 보호하고 가장 나약한 치부를 가리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죽은 소라의 빈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고, 그나마 조롱거리로 동네방네 조리돌림을 당하는 꼴을 면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이름 석자도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소라게였다. 그러니까 소라게에게 있어 소라껍데기는 목숨줄이었고, 면을 세울 수 있는 꿈인 거였다. 비록 죽은 소라의 이름을 팔고, 빈 껍데기를 앞세웠지만, 그 속에 든 한 줌의 자존심을 철벽 방어해 줄 수 마지막 보루가 소라의 빈 껍데기였다. 등에 짊어진 껍데기만으로는 어쩐지 미심쩍고 불안했던지 소라게는 갯바위에 붙어 자라고 있는 말미잘도 두엇 낑낑거리며 떼내어서는 소라껍데기에 붙였다.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말미잘의 촉수는 독으로 중무장한 창이었고, 소라게를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철옹성이 되었다. 그제야 걸음은 경쾌했고 몸짓은 우아했다. 꽃처럼 핀 말미잘은 어깨를 으스대기에 충분해서 벌겋게 충혈된 천적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걸음은 거들먹거림으로 가득했다. 하룻강아지도 때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었다.

남자의 나이는 쉰다섯 이름은 래춘 씨였다. 맏이로 딸이 하나 있고 둘째이자 막내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슬하에 1녀 1남을 둔 아버지였는데 자식들은 다 장성해 둥지를 떠났고, 그의 부인은 진작에 안녕을 고하고 각자의 길을 걸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던 래춘 씨는 뉘엿뉘엿 해걸음이 됐을 때, 그 바람이 얼마나 크고 힘든 바람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평범하다는 건 말이 평범이었지 하나도 평범하지 않았다. 상위 몇 퍼센트와 하위 몇 퍼센트를 들어내고 남는, 가운데에 위치한 대다수의 삶을 평범한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범주에 들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만 같은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평범에 들지 못했다. 겉으로 내세울 것도 없었고 속으로 쌓은 것도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 그대로가 남자의 오늘이고 현실이었다. 가릴 것도 없었고 꾸밀 것은 더더욱 없어서, 민낯으로 거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때때로 부끄럽고 민망했다.

손에 든 시집의 맨 마지막 페이지가 남자의 오늘을 말하고 있었다. 시집이 되었든, 소설책이 되었든 간에 모든 책의 마지막은 판권이란 이름으로 채워지게 마련인데, 거기엔 꾸미고 말고의 여지도 없이 이름이며 소속에 관한 것들이 전부였다. 예를 들자면 이랬다.


심청전

초판 1쇄 발행: 2021년 10월 18일

글쓴이: 심학규

펴낸이: 심학규의 처

편집인: 김편집

펴낸 곳: 뺑덕어멈 출판사

주소: 이름도 후지군 너라면 좋을리 없지


남자의 오늘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시집의 맨 끝에 매달린 판권이었다. 차마 놓지 못하고 매달린 말들이 빼곡히 책장을 채웠지만, 누구도 관심 있게 읽지도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선을 끌만큼 향기롭거나 화려하지도 못한 말들이 시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은 예리하고 정확해서, 그것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혼자 살았고 늘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 수 있는 힘은 수다였고 꿈이었다. 눈을 뜨고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그는 상상의 날개를 펼쳤고 되지도 않는 말들을 끄적이고는 했다. 그게 좋았다. 허상에 취해 안갯길을 걷는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공상에 빠져 한 말의 물을 마신다고 해도 그랬다. 어쩌면 그렇게 휘청거리다가 끝내는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가 발을 딛고 선 땅이라고 해서 보송보송한 것만도 아니어서 굳이 꿈과 현실을 구분 지을 필요도 없었다. 꿈꾸는 동안에는 얽매이거나 인내해야만 하는 속박도 없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어서 좋았다. 새들의 언어로 속삭이고 꽃들의 몸짓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일개미를 꼬여내 먼 어느 풀밭에서 뒹굴며 놀기도 했고, 참나무를 기어오르는 칡덩굴에 몸을 숨기고 해가 저물도록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생각 속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유했고, 자유로웠으며 건강했다. 그게 좋아서 그는 깨어있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널 사랑한다고 고백의 말을 남길 수도 있었다. 주눅 들거나 초라한 그는 없었다.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이란 그에게 그런 거였다. 비가 그친 오후에 하루는 그런 일도 있었다. 한바탕 비가 휩쓸고 간 보도블록에 달팽이 한 마리가 죽어라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져라 달팽이는 뛰어서 겨우 한 장의 블록을 지나 다음 블록의 경계면을 넘고 있었는데, 그 달팽이의 질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한마디 말을 무심코 뱉었다.

"그래도 넌 번듯한 집을 지고 다니네? 부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