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판타지의 세계
제작: 로렌 슈미트 외
출연: 헨리 카빌, 안야 차로트라, 프레이아 앨런
백발의 슈퍼맨이 나온다는 기대 하나로 시청했던 위처 시즌1은 기대 이하였다.
판타지 액션 대작이라는 광고가 허무하게 시즌1은 변변한 액션 하나 없었고 CG는 조악했으며, 괴물들은 80년대 특촬물에서나 나올듯한 퀄리티였다.
그나마 봐줄 만한 액션은 시즌1의 1화에서 게롤트가 '블라비켄의 도살자'로 소문이 나는 장면 하나뿐이었다.
세트와 등장인물도 가관이었다.
회차 하나하나 등장하는 세트장은 마치 몇 년 전의 게임 속 마을을 구현한 듯 허술해, 원래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연극 속 세트장을 보는 듯했다.
거기다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도 어디 게임에서 NPC를 그대로 데려다 놓은 듯 뻔한 대사와 뻔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내 손에 마우스나 컨트롤러가 있었다면 조작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토리도 전혀 이해가 안 되었다.
막강하다는 신트라가 어째서 하루아침에 그렇게 허무하게 박살이 나는지도 모르겠고 보잘것없던 닐프가드가 또 어째서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우게 되었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다.
거기다 시간대는 왜 그렇게 뒤죽박죽인지.
동시대에 진행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진행되었다니 이러니 헷갈릴 수밖에.
제작자는 이걸 반전이라고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혼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의외성의 법칙(Law of Surprise)'은 또 뭔가?
그게 뭐길래 다들 지레 겁먹은 표정들을 지으며 심각하게 구는지, 또 왜 아이를 가지게 되는지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즌2가 공개되었다는 걸 보았을 때도 딱히 이걸 시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게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성의 법칙'이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그게 뭐길래 여기서도 의외성, 저기서도 의외성 거리는 걸까?
내가 이해력이 딸린다면 한 번 더 보면 이해되겠지 하는 마음에 결국 시즌1을 다시 시청했다.
재밌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시청했다.
그리고 오늘 시즌2까지 시청을 마쳤다.
결론은
우와 이거 끝내주는데!!
새로운 판타지의 시작이다!
다시 보게 되니 스토리도 이해가 되고 의외성의 법칙이 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인물들의 행동이나 관계가 비로소 하나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위쳐는 어느 정도 스토리나 세계관을 알고 봐야 재미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위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위쳐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의외성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봐야 재미가 있어진다.
거기다 시즌1이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도 미리 알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롤트와 예니퍼는 과거에서, 시리는 현재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회차가 더해가면서 결국 세명이 같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판타지들과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세계관이기에 위쳐의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야 흥미를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기존 판타지 세계관으로 위쳐를 올려다보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반지의 제왕도 그랬었다.
일본식 판타지 세계관으로 반지의 제왕 1편을 보았더니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지만 반지의 제왕이 가지고 있는 모티브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그런 대작도 없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누구인가?
'호빗'이라는 매사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겁이 많고 이기적인 바로 그 종족 아닌가.
'호빗'은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고 세계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 보통 수준의 인간이 운명과 인연과 시대에 맞물리며 위대한 인간들이 해내지 못했던 그 일을 완수해낸다.
그 과정에서 위대하게 떠받들여지던 소수의 사람들도 결국 내면엔 호빗과 같은 모습의 나약함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고 보통의 사람들도 그 내면엔 '위대함'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선과 악이라는 극히 다르지만 또 지극히 같은 모습의 존재들이 뒤엉켜 전개되는 이야기, 그것이 반지의 제왕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지의 제왕'이라는 이야기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다시 위쳐로 돌아와, 위쳐는 3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왼쪽부터 리비아의 게롤트, 신트라의 시릴라 공주, 그리고 벤거버그의 예니퍼.
이 3명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합쳐지며 운명과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시즌1은 바로 그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가?',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란 본질적 물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기도 하지만 바꿀 수 있기도 한 것이 운명이라는 걸 드라마를 통해 얘기하고 있다.
게롤트와 예니퍼와 시리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진행하며 결국 같은 시간대에서 만나게 하는 것도 아마 이 '운명'이라는 주제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운명'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거니까.
시즌1에서의 핵심은 '운명'이지만 인상 깊었던 대사는 1화에서였다.
게롤트가 스트레고보르에게 한 말이었는데 '악'에 관한 대사였다.
"악은, 크든 작든 중간이든 다 똑같소"
악은 그저 악일 뿐이다.
더 큰 악, 더 작은 악, 선의가 조금 섞인 '악'
무엇으로 포장하든 악은 악일 뿐이라고 게롤트는 얘기한다.
시즌2는 '증오'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즌1에서 각기 다른 시간대를 진행하며 진행되던 이야기는 마침내 최종회에서 만나게 되고 시즌2부터는 이제 같은 시간대에서 이야기가 같이 전개된다.
증오에 관한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건 시즌2의 5화에서 위쳐가 되려는 시리와 그녀를 제지하는 게롤트와의 대화였다.
"당신처럼 무감각해지고 싶어요 게롤트. 과거와 거짓과 내가 한 일들에 대해. 제발 그렇게 되게 해 주세요"
"이런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도 그렇고 나도, 우리가 누군지를 잊을 순 없다. 감정은 죽여버릴 수 없단다. 다만, 최선을 다해 우리가 쥐고 있는 증오를 도려내는 거야"
다만, 최선을 다해 우리가 쥐고 있는 증오를 도려내는 거야
위쳐의 세계관에서 위쳐는 감정이 없는 돌연변이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는 것뿐인 것이다.
그들의 심장이 보통 사람보다 느리게 뛰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훈련을 통해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래야 중립을 유지하고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위쳐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렇지만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이 최선을 다해 증오를 도려내는 것이라니.
이런 명쾌한 대사가 어디 있을까.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인간임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끓어오르는 증오를 도려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우리 안의 악과 매일 싸우고 있고 때로는 승리를 때로는 패배를 하기도 한다.
위쳐 드라마에서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번번이 본질을 찌르는 대사를 한다는 것이다.
게롤트도 시리도 예니퍼도 그리고 그의 친구들도 저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말을 한마디씩 한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상황의 핵심을 파고드는 말을 저렇게 툭툭 던져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이 대사를 치는 장면들이 재밌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이게 원작 소설에서도 그런지 아니면 극작가가 탁월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엘프들과 소수 종족들, 그리고 괴물들에 대해서도 현재의 사회와 빗대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특히 시즌'2에서는 증오에 휘말리는 사람들과 종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그들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결과와 그것들이 끌어내는 또 다른 증오와 이야기, 운명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위쳐가 판타지이긴 하지만 결국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얘기한 것처럼 이야기를 그저 사실대로만 나열한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이고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위쳐는 그 스토리를 보는 재미만으로도 앞서 내가 얘기했던 연극 같은 세트 무대나 NPC 같은 인물들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시즌1을 보완하듯 시즌2에서는 여러 가지 시각적인 요소들의 디테일을 더 살리기도 하였다.
시즌1과 2에서 운명과 증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면 시즌3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인지 벌써부터 무척 궁금해진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헨리 카빌은 슈퍼맨보다는 백발의 위쳐가 훨씬 더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