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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은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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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Aug 16. 2023

프롤로그: 나를 찾아가는 시간

스무 해 넘는 직장생활, 그리고 나

2020년, 코로나가 유행하고 내 나이 마흔다섯이 되던 해에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누군가에게 마흔다섯이란 나이는 은퇴하기엔 이른 나이라 생각될 터이고, 조기은퇴/파이어족이란 말이 유행처럼 퍼지는 요즘엔 그 흐름에 올라탄 것으로 생각될 것도 같다.


스무 해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경험을 쌓았다. 커리어가 주가 된 경험이었고, 인생에 주어진 여러 역할 중에서도 직장에서의 역할이 내 중심에 있었던 거 같다. 부모님의 막내딸,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였지만, B사/N사의 부서장을 거치면서 나름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라 자부했고, 어느새 회사에서의 직책이 나라는 사람을 대변했던 거 같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한 동안은 나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십이삼 년 전에 이혼을 결정하고 한 남자의 아내라는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와는 다른 혼란이었다. 여전히 ‘ㅇㅇ이의 엄마’였지만, 무언가 빠진 것만 같았고 나를 규정할, 나를 소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출퇴근과 더불어 직장생활이라는 루틴이 빠져버린 내 생활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넘쳐나는 시간의 여유가 버거웠고 무언가 해야 할 거 같아 조급해졌다. ‘이렇게 쉬어도 되나? 뭔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직 필드에서 활동 중인 지인들을 보며 내가 잊히고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 왠지 두려웠다. 어쩌다 보니 은퇴를 결정하게 된 것이지만, 내가 선택한 것임에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별의 상처를 겪을 때 흔히 듣게 되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직장생활과의 이별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은퇴 만 3년 차, 이제 이 생활도 자리를 잡아간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많이 챙겨주지 못한 딸아이는 독립적으로 자랐고 11학년이 되었다. 입시준비에 바쁜 아이를 이제라도 좀 돌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전업주부로의 시간, 거기에 더해 새로운 경험들로 나를 알아가고 돌보고 있다. 문득 경제적인 부분에 우려의 마음이 생길 때도 있지만, 남들과 비교하기보단 가진 것으로 노후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나의 은퇴생활은 이제 막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흔하게 들리는 요즘, 어쩌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남았는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나를 알아가고, 나를 돌보고, 나를 사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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