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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01. 2018

초봄의 상념

<100일 글쓰기 74/100>


오랜만에 K와 전화를 했다. 타국에서 프리가 아니라 풀타임 근무를 시작한지 일주일된 후기를 들려주었다. 듣는 내내 연신 '와, 좋겠다' 라고 반응했다. 딱딱 떨어지는 나인 투 식스 근무에 테스트만 6개월, 새롭게 출시하는 기능이 많지 않아 애초에 긴급하게 문제가 터지는 상황도 거의 없고, 치료나 수술로 의사 소견서가 나오면 연차랑은 별개로 유급 휴가 등등. 듣다가 K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가 제작 지원으로 드라마에 나오더라, 주인공이 다니는 근무 환경이 좋은 회사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마흔 살쯤이 되면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평을 했다. 끄트머리에는 여느 때처럼 빨리 퇴사하라고, 안식도 쓰고, 정 힘들면 휴직도 하라고 그런다. 남한테 쉽게 말하는 류가 아니라 정말로 본인은 안 좋은 근무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탈출도 하고, 쉴 때가 됐다 싶으니 자체 휴직기를 만들어 해외로 나가는 걸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진심으로 내 멘탈이나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 알아서 보이지도 않는데 소리 내어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30분 넘게 통화를 하다가 '나 sis한테 홍게 까줘야됨' 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 장례식 때 쓰고 남은 비닐을 바닥에 깔고, 10마리에 달하는 찐 홍게를 깠다. 가위로 다리 마디 부근을 살짝 잘라 남은 부분은 힘주어 비틀고 좌우로 당겼다. 뽑혀나온 살점은 접시에 담고 안에 남은 살은 길게 잘라 긁어냈다. 마침 어제 글감 주제로 냈던 '죽기 전 꼭 먹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K와 여행 때 처음 먹어봤던 게 사시미가 떠올랐다. 늦봄, 적당히 선선한 바람을 맞아가며 느긋하게 교토를 돌다가 들어간 오사카에서 먹었던 그것 말이다. 둘 다 환전해온 돈이 빠듯해서 고민을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카드로 간다!' 하고 주문했던 코스 요리에 나왔었다. 그것도 괜찮겠네, 싶었다. 그 시절에도 초조한데 지루하고 괴로웠었는데 게 사시미를 한 입 크게 물었을 때는 혀 위에 녹는 모든 게 환상적이었으니까.

초봄, 본가 주위의 벚나무들은 꽃을 피우고도 아직 작고 왜소해서 보기에 아름답다기보단 귀엽기만 하다. 봄의 초입에 어느 봄의 끄트머리를 되짚어 보는 날. K에게 '거기 요즘 날씨는 어때?' 하고 물었다. '미친듯이 더워지기 시작할 때야.' 라는 대답이 불퉁해서 조금 웃었다. 여름을 싫어하는 K. 하지만 삶의 나침반을 온통 여름이 그득한 곳으로 맞춘 K. 다음 주에 만개한 벚나무가 보이면 사진이나 잔뜩 찍어서 보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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