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아저씨 출근룩
지난 원고를 보낸 지 한 달 만에 여러 가지가 변했다. 사는 곳과 하는 일이 달라졌다. 전에 4년동안 살던 집을 떠나게 됐다. 그 중에 새 직장도 다니기 시작했다. <디렉토리>라는 잡지에서 부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편집장이라 해도 팀원이 한 명이라 원흠 없는 노라조의 조빈 느낌이다. 감사한 기회고 잘 됐지. 조금 정신이 없긴 했다.
그래서 옷이 없어졌다. 이렇게 적으니까 좀 이상한데 정황은 이렇다. 이사가야 할 집을 다 고치지 못한 채로 집을 떠나게 되어 지금 잠깐 다른 곳에 머무르는 중이다. 전에 입던 옷은 다 창고에 보관했다. 임시 거처에 옷을 다 싸들고 올 수는 없다. 가장 기본적인 옷만 몇 벌 들고 나와 살고 있다. 그 옷으로 출퇴근을 해야 한다. 직장 위치는 성수동. 이럴 때는 뭘 입어야 하나 생각하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마침 29cm에 원고도 적는 중이겠다, 30대 후반 아저씨가 성수동에 첫 출근을 할 때 필요한 옷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기회 삼기로 했다.
나는 뭔가 고르기 전에 기준을 정해보는 성격이다. 기준을 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대로. 우선은 면 함량이 높은 것. 100% 혹은 그에 가까운 것. 그래야 빨 수록 부드러워지고 오래오래 마구마구 빨아도 적당히 후줄근한 멋이 난다고 나는 생각한다(남도 그렇게 봐 주었으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이즈는 이리저리 입을 수 있는 정도로 여유 있었으면 좋겠다. 모양은 단정했으면 좋겠고, 별도의 무늬나 패턴은 원치 않는다. 내구성, 단정함, 단순함, 다용도 활용가능성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바지는 치노 팬츠를 찾았다. 청바지가 튼튼한 옷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나 막상 내게 청바지는 상당히 불편한 옷이다. 짙은 걸 입으면 여기저기 묻어나고, 비싼 걸 입으면 길들여질 때까지 뻑뻑하고, 싼 걸 입으면 흐물흐물하고, 언뜻 보기엔 다 똑같이 생겼는데 입어 보면 묘하게 실루엣이나 밑위가 달라서 매번 새로 사야 한다. 청바지의 멋이라는 개념부터가 패션 업계의 선전술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다. 말은 이래 놓고 온갖 청바지를 좋다고 사 입긴 하지만. 아무튼 30대의 튼튼한 바지란 치노 팬츠 아닌가 싶어졌다. 튼튼하고 낙낙한 치노 팬츠.
마침 29cm 에 마음에 드는 치노 팬츠가 있었다. YMCL KY라는, 각국 군용품이나 빈티지 상품 등을 취급하고 생산하는 브랜드였다. 처음 보는 브랜드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치노 팬츠의 원형은 군복이고, 면 100%에 원단이 튼튼해 보여서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사이즈가 애매해서 32사이즈를 샀더니 90년대 힙합바지처럼 넉넉한 치노 팬츠가 왔다. 움직임이 편하니 나쁠 것 없다. 두께가 적당히 두꺼워서 가을까지 입을 수 있을 것 같고 모양도 잘 잡힌다. 아주 만족했다.
셔츠는 옥스포드 셔츠를 고르기로 했다. 나는 어깨가 좁아서 상의는 넉넉하게 입는 걸 좋아한다. 이번엔 원래 사이즈에서 세 사이즈 큰 것 정도를 입고 싶었다. 그쯤 되면 기분에 따라 바지 안에 넣어 입을 수도 있고 티셔츠 위에 빼서 입을 수도 있다. 나이 들어 보니 몸에 너무 잘 맞는 맞춤 셔츠도 옷을 너무 잘 아는 사람 같아서 조금 덜 내킨다. 어깨가 잘 맞는 셔츠의 아름다움이 분명 있으나 내 직군에서 그런 셔츠는 정장을 입을 때 한두 벌 있는 걸로 충분했다. 색은 그야말로 무난한 라이트 블루로.
그 결과 더 레스큐의 옥스포드 셔츠를 골라 보기로 했다. 요즘은 '시티 보이 룩'이라는 이름으로 기형적으로 치수를 키운 셔츠들이 많았다. 시대의 실루엣을 만드시는 노고는 이해합니다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런 옷을 보면 매드몬스터의 얼굴을 보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이 셔츠를 고른 이유는 사이즈가 가장 상식적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로고 때문에 고민했다. 너무 개 로고가 크지 않나 싶다가 뭐 별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업체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정 신경 쓰이면 겨울옷 차림에 입고 티셔츠나 니트같은 걸 입으면 되지. 실제로 받아보니 성의 있게 잘 만든 옷이다. 막상 입고 나면 강아지 자수의 미묘한 부끄러움을 잊을 정도로 훌륭하다. 잘 입고 있다.
바지를 주문할 때 생각해보니 벨트도 필요할 것 같았다. 바지의 상세 치수를 모르니까. 마침 가죽에 색을 덧대지 않은 벨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찾다 보니 세일하는 벨트가 하나 나왔다. 브라운야드 벨트는 튼튼하고 얇아서 마음에 들었다. 지금처럼 새것일 때도 좋고, 나중에 이런저런 얼룩이나 주름이 묻어도 근사할 것이다. 그 얼룩이 내 물건에 쌓인 내 시간의 흔적이니까.
반바지도 하나 있었으면 싶었는데 나이 드니까 세간의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도 했다. 출퇴근길에 반바지를 입어도 될 것인가. 요즘 세상에 쓸데없는 고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삶의 여러 면모를 고려할 줄 아는 것도 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 아니려나. '반바지 있어야 한다'와 '없어도 된다' 중에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단한 대안을 찾았다. 이프엘스의 탈착식 반바지다.
이 반바지 겸 긴바지, 긴바지 겸 반바지는 여러 모로 정이 가는 옷이다. 반바지 아랫부분에 단추구멍이 있고 그 아래로 여분의 바짓단이 단추로 결합되는 구조다. 야외 활동을 할 때는 반바지로 입다가 에어컨이 너무 센 곳에 가면 단추를 채워서 긴바지로 만들 수 있다. 긴바지만 출입 가능한 격식 있는 장소에 갈 때도 바짓단만 있으면 문제 없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나 같지는 않은지 이 옷은 지금 50% 할인 중이다. 하긴 나도 정가라면 골랐을 지 잘은 모르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이 이프 엘스 반바지를 가장 자주 입는다. 새 회사는 재택근무 등 자율근무도 많기 때문이다. 원래 의도대로 긴바지에 셔츠를 입고 벨트를 하고 갈 때도 많다. 성수동 주변의 젊은이들 옷차림에 비하면 누가 봐도 아저씨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적어도 젊은 척은 안 했으니까.
내가 어릴 때 '1년을 입어도 10년같은 옷, 10년을 입어도 1년같은 옷'이라는 옷의 카피가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고 지금 그 브랜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저 카피만 남아 내게 좋은 옷의 기준이 되었다. 이번에 고른 옷들이 다 그런 옷이다. 출근 일정 때문에 급하게 골랐지만 다 마음에 든다. 앞으로 오래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훗날 내게도 2021년 초여름은 이런 옷을 샀던 때로 기억되겠지.
29cm 위클리 에세이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