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4
원문: https://www.ulcpress.com/forum/view/549123
서울에 서울로7017, 뉴욕에 하이라인파크(The High Line), 파리에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가 있다면, 수원에는 화성이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이 만든 문화유산, 쉽게 말해 옛 것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수 있다. 앞의 세 공원은 대표적인 포스트인더스트리얼 파크(post-industrial park)로서 20세기 후반 산업화가 휩쓸고 간 도시에 남겨진 노후한 교통 인프라가 선형 공원으로 되살아난 공간이다. 한때 도시의 혈관이었던 고가도로 또는 고가철도가 수명이 다하면서 서울로7017같은 ‘선형공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수원 화성도 의외로 이들과 닮은 구석이 있다.
수원 화성은 포스트인더스트리얼 선형공원과 세 가지 속성을 공유한다. 먼저, 수원 화성 역시 과거 선형의 도시인프라였다. 현대 선형공원의 토대가 된 고가도로·고가철도가 산업사회에서 기능했던 인프라라면, 수원 화성은 전산업사회의 선형 인프라다. 근대 도시가 자본의 순환을 위해 도로 인프라 확충에 주력했다면, 외침이 끊이지 않던 전근대 조선에서 중요한 것은 군사 인프라, 즉 방어를 위해 도시를 둘러싸는 성곽이었다. 특히 정조의 야심 찬 계획 신도시를 지키는 화성은 기존 성곽과는 차별화된 강력한 기반 시설이었다. 조선에서는 원래 읍성과 산성 두 개의 성곽이 있었는데, 읍성은 도시 또는 읍을 둘러싼 성곽으로써 행정 구역의 경계를 나타냈으나 실질적인 방어 기능은 발휘하지 못했다. 전란 시 사람들이 대피하고 농성했던 곳은 읍성이 아닌 산성으로, 가장 필수적인 도시 외부의 군사인프라였다. 문제는 전란이 끝나고 돌아오면 읍성 내부 백성들의 삶터는 폐허가 되고, 읍성은 무너져 경계 기능조차 잃는 일이 많았다.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은 그 자체로 강력한 도시의 읍성으로서 이원화된 성곽시스템을 극복하는 단일한 성곽 인프라였다.
그런데 수원 화성은 군사시설치고는 놀랍도록 아름답다. 두 번째 수원 화성과 포스트인더스트리얼 공원의 공통점은 ‘미’다. 선형의 도시인프라라고 해도 아름답지 않다면, 그 공간은 단순한 둘레길, 심지어 흉물일지도 모른다. 약 200년의 시차를 두고 완공된 뉴욕 하이라인과 수원 화성은 모두 그 공간을 걷는 이를 매료시킨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이 현대적 설계로 새로이 부여된 것이 아닌 조선말 당대의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현대 선형공원과 차별화된다. 그렇다면 수원 화성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미는 주관적인 것이라지만 여기서는 유네스코(UNESCO)가 공인한 수원 화성의 조형미에 주목하기로 한다. 48개의 군사 시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자연환경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1] 즉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2] 예를 들어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장안문을 기준으로 동서에 위치하는데, 그 모습이 은근히 다르다. 전망대이자 공격소인 두 ‘공심돈(空(공)心(심)墩(돈))’은 재료와 구조, 높이 상의 일관성이 있어 주변과 어울린다. 그러나 서북공심돈이 네모난 외양을 가진다면 동북공심돈은 둥근 모양으로 지어졌고 나선형의 독특한 내부 구조를 가져 ‘소라각’이라는 별명을 가진다. 이러한 직선과 곡선의 변주 그리고 48가지 건축물의 각축전 때문에 하나 하나에 발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정조는 군사시설을 왜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정조는 ‘왜 군사용 건축을 이처럼 예쁘게 짓느냐’는 신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기느니라.”[3]
그 아름다움은 적은 몰라도 세월은 이겼다. 수원 화성은 그것이 대비한 외침을 겪지 않았으므로 (아름다운) 방어 시설로서 효용을 증명하지 못했다. 문화유산 수원 화성은 더 이상 군사 시설로 기능하지 않는다. 본래의 아름다움은 남았으나 본래의 용도를 잃은 48개의 방어 시설은 이제 순전히 건축적인 조형물, 폴리(folly)가 되었다. 파리의 도시공원, 라빌레뜨 파크(Parc de la Villette)의 강렬한 붉은색 조형물처럼 방어 시설은 결과적으로 아이캐쳐(eye-catcher)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성곽은 폴리가 즐비한 미적 여정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수원 화성은 현재에도 도시민의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 한마디로 도시공원이다. 수원 화성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가이드맵을 들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눈에 띤다. 하지만 수원 화성의 풍경은 대부분 가벼운 옷차림으로 느긋하게 둘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서울로7017이나 뉴욕의 하이라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로7017에서 발 밑 소란스러운 도심을 두고 멀리 남산을 바라보듯, 하이라인에서 동쪽으로 맨해튼의 빌딩숲, 서쪽으로 허드슨강을 조망하듯, 화성의 도시산책자도 복작이는 대도시 수원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포스트인더스트리얼 파크는 자동차 혹은 기차를 위한 교통 인프라를 리노베이션한 것이고 동시대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가 세운 군대 시설물을 복원한 유산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대 시민의 휴식과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도시공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포스트인더스트리얼 파크와 수원 화성은 다를 바가 없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야심작이자 당대 과학기술의 집약체인 조선의 도시인프라였다. 그러나 약 150년 후의 한국전쟁은 과학기술이 만든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해 재래식 전투에 대비한 수원 화성을 무참히 파괴했다. 힘들게 얻은 평화 속에서 수원은 조선시대 수원읍(화성유수부)의 3배가 넘는 대도시 수원시로 성장했고, 화성 건축의 A-to-Z가 담긴『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1970년대 수원 화성은 본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시대 수원 화성이 도시를 둘러쌌다면 이제 도시가 화성을 둘러싼다. 화성은 도시 생활권과 분리된 박제된 문화유산 혹은 외곽의 등산로가 아니라 역동적인 도시와 함께 살아 숨쉰다. 교차공격을 막기 위해 구불구불하게 설계된 성곽은 단조롭지 않은 도심 산책로가 되어주며, 성벽 아래 적군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한 창(窓眼)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망원경이 되어준다. 성문에 침투한 적군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드는 옹성(甕城)은 성곽에 오르기 전 항아리에 들어온 듯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각기 다른 조형미를 가진 시설물이 성곽길을 따라 늘어서고 시민들은 그곳에서 쉬고 걷고 운동하고 구경하고 또 감탄한다. 수원 화성은 동시대적 의미에서 도시의 선형공원이다. 18세기 말 정조가 밟았을 수원 화성에 21세기 도시민의 발자취가 흐른다.
[1] 곽보현. (1997년 4월 5일). <인터뷰>유네스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조사관 실바 씨. 중앙일보. 종합 15면.
[2] 김기동. (2006년 9월 19일) 화성,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까?.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0523.
[3] 『정조실록』정조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