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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isBoucher May 23. 2017

파리를 파리로 만든 사람, 유젠 오스만 - 1/3

오스만 출현 전의 파리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이 글은 저의 브런치에서의 첫 글이고 저를 아는 사람은 이 동네에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딴지일보에서 잠깐, 아주 잠깐 같은 아이디로 글을 몇 편 썼었던 빠리부셰입니다. 아이디에서 드러나듯 빠리에 거주 중인 학생 건축가이고, 앞으로 주로 건축과 도시에 관한 짧지만 긴 호흡을 갖은 글들을 쓸 예정이며, 간간히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파리 현지 외국인 노동자의 시점에서의 감상도 적어 볼 생각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물론, 첫 글의 주제를 유젠 오스만이라는 사람으로 잡은 것은.


Hauss... who?


유젠 오스만(Eugène Haussmann)이라는 사람은 파리+도시+건축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면 도저히 한 번 다루지 않을 수 없는, 파리라는 도시가 국제사회에서 오늘날의 위상을 갖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저와 제 수많은 유학생 동료들이 거대한 아시아 대륙과 유럽의 3/4이상을 지나 이 대륙의 거의 서쪽 끝까지 오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을 만들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 이 도시를 한번 보러 오기 위해 수백만 원을 거뜬히 지불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전 세계에 떨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장본인이 바로, 나폴레옹 2세 시대의 파리 시장을 지낸 이 유젠 오스만이라는 아저씨 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를 반영하듯 파리에는 오스만 대로도 있고(오스만시대에 붙혀진 이름이긴 합니다만...), 오스만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서적들이 발행되고 있으며, 오스만의 파리에 관한 전시회도 꽤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파리의 건축 상설 전시회장이라 할 수 있는 파비용 드 아스날(Pavillon de l'Arsenal)에서도 현재 오스만에 관한 전시가 2017년 6월 초까지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오스만 치하의 파리의 변화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파리의 오스만화(Haussmanisation de Paris)'라는 말이 쓰일 정도니, 이 아저씨가 파리에 해놓은 것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쳐왔는지 알 수 있겠죠.


그렇다면 유젠 오스만은 누구인가 하면은, 파리 시장이었습니다. 1809년에 태어나 1891년에 사망한 19세기를 통째로 살아간 오스만은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간 파리의 시장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라 센느(La Seine) 데파트멍(Département, 한국의 군정도의 크기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입니다.)의 수장이었는 데요, 현재의 파리보다는 조금 큰 행정구역 었습니다만, 실제로 도시화가 되어있는 지역의 면적은 오히려 지금보다는 조금 적었죠. 오늘날의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파리 외곽 순환도로가 이 시절에는 외곽 성벽이었는데, 중세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파리에는 외곽 성벽이 1910년대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이 파리시장에 취임했을 때는 이 성벽 안쪽의 약 삼분의 이 정도가 도시화 되어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오스만이 파리 시장으로서 건설해 놓은 파리의 모습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운 수도 파리’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파리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파리의 얼굴 역할을 하는 건물들인 에펠탑이나 몽마르트르의 사크르-쾌르 성당, 노트르담, 루브르 같은 문화재들은 오스만 시대에 건설되지 않았고 이 중 몇몇은 그의 시장 생활 이후에 건설되긴 했지만, 그래도 파리가 전 세계의 문화 수도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은 오스만 시장이 단행한 다양한 도시정책 때문이 틀림없습니다.


이 아저씨가 오스만 남작입니다.
사진 출처: The Miriam and Ira D. Wallach Division of Art, Prints and Photographs: Print Collectio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George-Eugène Haussman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Digital Collections. http://digitalcollections.nypl.org/items/510d47df-e2a5-a3d9-e040-e00a18064a99


그래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오스만이 파리라는 도시에 도대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것들을 건설했고 어떤 것들을 부셨는지, 그리고 그런 건설과 도시정책들이 파리라는 도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둘러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분명 한국의 상황에 필요한 요소들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19세기의 파리


유젠 오스만이 6대에 걸쳐 살아왔었다고 하는 파리의 모습은 어땠을 까요? 파리의 이런저런 부대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프랑스와 파리의 역사를 살짝만 훑어 보겠습니다. 후에 남작이 되는 죠르주 유젠 오스만이 태어난 19세기의 파리는,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즉위한 직후의 파리입니다. 서유럽을 약 10년 만에 거의 통일해 버린 황제 나폴레옹은 당시 파리의 상황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서유럽을 통일했으니 서유럽의 수도 역할을 해야 하는 도시인데, 당시의 파리는 중세도시에서 시설 면에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채 곳곳에서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이 - 시리즈로 대표되는 부르봉 왕조 시절의 파리에도 ‘근대화’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베르사유 중심의 왕정에 철저하게 빠져있던 시절의 파리에 있었던 도시 프로젝트들은, 왕궁 주변의 재정비나 부르주아들의 상업활동을 위한 광장의 조성 같은 극히 일부 지역에 국한된 사업들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샌드위치 피크닉하기 제일 좋은 장소인 보쥬광장은 원래 루이 13세시대에 완공된 왕족 / 귀족용 정원이었습니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불어판 / Alno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Alno


오스만 이전의 파리의 유럽내 지휘는 실상 현재의 그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서쪽 대서양 너머 미대륙을 발견하고, 베니스의 상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하며 큰 부를 이루고 있던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문화와 학문이 중세를 지나 드디어 꽃을 피우며 제국주의 시대로 달려가기 시작하던 시절의 파리는 유럽에서도 변방의 수도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건축과 도시 분야에서는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들, 특히 주류였던 이탈리아에 비해선 상당한 격차가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고딕 건축이 유행하고 있었고, 조금 시차를 두고 들어온 르네상스는 프랑스 특유의 스타일과 섞여서 프렌치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과 도시 분야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화려했던 로마시대의 그것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비트루브(Vitruve)라는 10세기 넘게 이전에 태어난 건축가의 건축 매뉴얼을 찾아내 그것을 건축계의 성경처럼 생각하고, 이탈리아와 그리스에는 아직 남아있던 그리스 로마시대의 폐허들을 분석해 그 당시의 건축 양식을 베껴내는 것이 당시 최첨단의 건축이었으니,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약간 변방이 될 수밖에 없었죠. 이 당시 프랑스 건축학생들이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상이 ‘로마 상(Prix de Rome)’이라는 것이었는데요, 상품이 바로 로마에 가서 1년간 체류하며 로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로마시대의 폐허들을 연구하고 베끼는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때 유행한 것이 로마 그리스 시대의 기둥 장식을 복제해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과 학생이라면 서건사 시간에 많이 보았을 도식이죠. 왜 배우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잘...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런던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혁명에 앞서 금융혁명과 의회정치를 이룩한 영국의 City가 한창 달려 나가는 18세기, 파리에서는 루이 시리즈의 부르봉 왕가가 본격적으로 전제정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파리에는 돈이 항상 부족했고, 도시 자체에 큰 변화를 줄만한 프로젝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루이 16세 치하에서 결국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파리는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갑니다. 나폴레옹 치하의 파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다르게 동진을 하는 장수의 나라이니, 전 세계가 파리를 지켜보게 되었겠지요. 혁명을 목격하고, 혁명에 의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파리 도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많은 투자를 한 것도 당연하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다 10년 만에 얻었던 땅을 모두 빼앗기죠. 나폴레옹은 취임한 기간 동안 파리를 통째로 개혁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돈이 모잘라 몇몇 길을 정비하는데 그칩니다. 아, 물론 다양한 기념 건축물은 세웠지요. 파리의 제왕들은 모뉴먼트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루브르 튈리리 공원 옆의 Rivoli 길이 나폴레옹1세 치하에서 파리가 얻은 몇 안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이마저도 루브르 궁전옆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불어판 / Pascal3012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Pascal3012


어쨌거나 앙시앙 레짐을 해체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 민중의 영웅, 나폴레옹 1세는 유럽 곳곳을 박살 내며 다양한 도시들을 구경했고, 마지막으로는 (창살 뒤에서) 구경하게 된 도시인 영국 런던을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오스만 남작이 1853년에 파리 시장으로 취임해(정확히는 라 센느 데파트멍의 장이지만 편의상 파리 시장이라고 하겠습니다.) 17년간 다양한 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몰아 치는 것도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아이디어들을 잘 활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스만의 가장 획기적인 프로젝트인 ‘도시 뚫기’는 이미 나폴레옹 1세가 갖고 있었던 카드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진처럼요.


중세를 탈출하는 시대에는 이탈리아에, 산업화를 맞는 시대에는 영국에 끌려가기만 하고, 그러면서도 산업혁명의 풍파를 그대로 맞아 도시 안 곳곳에 빈민촌이 생기기 시작한 파리, 그것이 19세기 중반 오스만이 맞닥드린 파리였습니다. 나폴레옹 1세가 유럽을 통일하고 부를 이루나 보다 했더니 러시아에게 맞은 한방에 KO 되어버린 프랑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두어 번의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까지 겪어낸 파리는, 그냥 그 시대 역사의 타임라인을 보고 있으면  그 도시에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그런 도시였죠.

어쨌건 (삼촌과 피도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이름 빨로 당선된) 나폴레옹 3세가 두 번째 황제로 즉위하고, 파리는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찾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초의 파리를 묘사한 글들을 보면 참으로 끔찍했을 것 같습니다. 도시는 계획 없이 지어졌고, 특히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는 파리 시내 외곽에는 빈민촌이 마구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이 마구 지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하수도 시설이 구비가 안 돼있었고, 사람들은 오물을 길에 그대로 내버렸습니다. 길들은 쭉 뻗은 대로는 눈 씻고 찾아도 파리 시내에 한 대 여섯 개, 나머지는 대부분 매우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란 것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져 앞도 잘 안 보이고, 건물로 가로막혀 해도 안 들어오고, 바람은 멋대로 부는 동네 양아치가 활기 치기 딱 좋은, 그런 길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급기야 1832년부터 유럽 전역을 강타한 콜레라가 여러 번 지나가는 파리는 정말 살기 힘들었을 겁니다. 나폴레옹 1세가 취임 10년 만에 프랑스를 패전국으로 만들었고,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조와 시민들이 전쟁을 벌였으며, 다시 혁명이 일어나고, 그즈음 프랑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에서 친위 쿠데타로 황제가 되는 동안의 파리는 이런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파리의 인구는 55만에서 약 100만으로, 두배 가까이 뛴 겁니다. 과연 산업혁명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구불구불하고 오물이 흐르고 습하고 어둡고 바닥은 아무렇게나 깔려있는 길. 19세기초의 대표적인 파리의 모습입니다. 작가미상.


오스만 이전의 파리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파리가 아니라는 것이 이제 좀 더 와 닿으실 것 같습니다. 정치, 산업, 사회가 급격하게 요동치는 19세기 초의 파리는 아마도 강력한 리더십을 원했을 겁니다. 그것이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두 번째로 끌어내리고도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밑에서 드디어 오스만은 1853년 파리의 시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가 죽는 1870년까지 파리시장으로써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못 할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며 파리를 전 세계의 수도로 만들어 놓습니다. 다음 글(아마도 다음 주)에서는 오스만이 얼마나 대단한 프로젝트들을 얼마나 독재적으로 실행했는지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서울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울시장이 불도저 김현옥이라고들 하지요. 오스만도 김현옥처럼 어렸을 때는 군인이었고, 파리 시장직을 제의받기 직전에 파리 경시청장 직을 제의받은 무관이라면 무관입니다. 그 둘이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달랐는지...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커버 사진은 작가 미상의 옛날 엽서입니다. 출처 웹페이지 : http://www.cparama.com/forum/paris-avenue-de-l-opera-t51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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