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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isBoucher Jun 16. 2017

광화문, 혁명에 성공하다 - 1/2

탄생부터 촛불 혁명,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고, 촛불시위가 한동안 전국을 휩쓸더니 대통령이 탄핵되고, 급하게 선거를 치러 문재인 씨를 한국의 새로운 수장으로 맞이한 지 이제 한 달 여가 되어 갑니다. 이 한 문장에 서술한 사건들 하나하나가 역사적으로도 앞으로도 있기 힘든 사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이 단 몇 개월 만에 이뤄진 것이 다시 뒤돌아봐도 대단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을 비롯한 한국 곳곳에서 열린 촛불시위들을 직접 참가할 순 없었지만 파리의 교민들도 에펠탑 건너편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모여 몇 번 집회를 갖었습니다.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제가 이 글에서 주목하게 될 것은 역시 도시공간, 광화문 광장입니다. 광화문 광장은 지금은 촛불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역사의 장에서 크게 두 번 등장했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집회 시위입니다. 저는 화면으로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다양한 미디어의 유튜브 진출 덕분에 라이브로 보긴 했습니다.) 그 당시 열렸던 이벤트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집회, 시위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상당히 진보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국에서 그 행사에 직접 참가하셨을 독자 여러분도 그에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나 학생 같은 특정한 사회적 계급을 뛰어넘어 전 세대를 아우르는 수백만의 시민이 거리로 나온 이 집회는 당시에 촛불 문화제라고 불렸었습니다. 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의 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광화문이라는 공간이 거대한 전시장, 콘서트장, 혹은 수백만이 참가한 퍼포먼스의 현장으로 변신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두 번째로 광화문이 미디어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에 집무실을 열 것을 선언하며 청와대를 개방하고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을 때입니다. 물론 다른 후보들도 청와대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다양한 안을 내놓았습니다만, '광화문 대통령'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중의적 상징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슬로건을 보여주지는 못했었습니다. 광화문 대통령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광화문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집회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과, 둘째로는 경복궁 너머에 있는 청와대가 아닌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일을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요즘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문재인 정부를 인문학적 상징을 잘 다루는 정치 집단이라고 평가하던데 건축과 도시 공간을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이 정의에 상당히 동의하게 만드는 슬로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광화문 대통령'이라는 표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재인이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 싶었던, 그리고 우리가 느끼고 있는 상징성은 어떤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2002년에 시작되었던 촛불시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광화문 광장이라는 장소는 다양한 이유로 꽤나 특이한 장소입니다. 일단 우리가 광화문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은 오세훈 시장 시절 조성된, 역사가 지극히 짧은 도시 건축물입니다. 그 전에도 이 공간을 광화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지만 실제 지명은 세종로였습니다. 즉, 우리가 광장이라고 부르는 그 공간은 사실 광장이 아니라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600년도 넘게 전에 조성되었던, 즉 조선왕조가 시작하는 시점에 조성되었던 대로입니다. 우리는 조선시대 육백 년과 일제시대 오십여 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오십여 년 동안 길이었던 곳을 지금 너무나도 당연하게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 공간을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까요? 

광화문 광장이라는 지명을 뜯어보면 의문이 드는 구석은 또 있습니다. 바로 광화문이라는 명사입니다. 광화문은 말 그대로 문,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경복궁의 남쪽 문으로써 임금이 몸소 행차하던 바로 그 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광화문 광장이라고 불리는 장소는 당시에는 광화문이 아니라 '육조거리'라고 불렸었습니다.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하나의 선위에 존재하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독립된 존재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 속해 있는 육중한 대문이고, 육조거리는 조선시대에 각종 정부 부처들과 그 수장들이 사는 집이 접해있던 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이 육조거리를 세종로로, 다시 그 세종로를 광화문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을 광화문 대통령이라고 직접 명명한 것은 광화문 광장의 이름이 변화하는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의 육조거리와 광화문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했는데요, 이 장소는 조성되는 시작점부터 한국 정치권력의 중심 세력이 자리 잡은 곳이었습니다. 육조거리와 광화문을 잇는 축이 시작되는 곳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근정전입니다. 근정전은 경복궁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데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 바로 이 근정전입니다. 조선의 임금이 즉위식을 하는 곳도 이 곳입니다. 조선왕조의 권력의 시발점과도 같은 곳이죠. 근정전 안에 있는 왕좌(조선에서는 어좌라고 불렀습니다.)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권력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 어좌에서 앞을 바라봤을 때 왕의 시야의 방향이 거의 정남 쪽이 되는데, 거기서 문 두 개를 지나면 경복궁 전체의 정문인 광화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광화문을 열어재끼면 조선의 제 1 대로라고 할 수 있는 육조거리가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육조거리에는 지금의 재경부, 국토부 같은 각종 정부 부처들이 줄지어 있고 조선의 3 정승이 합쳐져 있는 기관인 의정부도 바로 이 육조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육조, 의정부, 한성부(지금의 서울시청입니다.)등의 기관장들이 각 기관 건물 내에 거주했었고, 따라서 왕이 국무회의를 주최하면 곧장 뛰어올라 올 수 있는 위치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최고 권력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모여서 살았던 장소가 바로 지금의 광화문 광장이 되는 것이죠. 육조거리는 조선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국가단위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시키면서 광화문을 옮기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권력의 정점이 모여 있는 그 축, 그 축이 다시 왕좌로 빨려 들어가는 구멍을 거대한 석조 건축으로 막아 버린 것이죠.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부수고 일부 건물들을 팔아 넘기기 시작한 것이 1910년,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16년입니다. 이 건물은 잘 아시다시피 김영삼 정부에서 그 역사에 비해서 아주 짧은 논의 기간 끝에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는데, 해체 전에 지금의 세종로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시면 아마 오늘날의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는 것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총독부 건물은 일단 광화문 누각에 비해서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중앙 돔의 높이도 높이이거니와 좌우로 펼쳐져 있는 건물도 꽤 크고 높습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경복궁 뒤로 솟아 있는 북악산을 상당 부분을 가리는 효과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연면적으로 따지면 지어질 당시에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한반도의 인민들에게 조선의 모든 권력은 일본에 떨어졌고, 조선왕조의 뒤를 지켜주던 북악산을 비롯한 백두대간은 그들의 힘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떨치려는 의도였겠죠. 


경복궁 내 조선물산공진회. 1915년
조선물산 공진회라는 이름의, 지금으로 따지면 엑스포가 열린 것도 이 즈음, 1915년입니다. 총독부 건물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지만 광화문에는 일장기가 걸려있고 경복궁 내부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삽화는 당시 배포되었던 홍보자료의 일부.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고 그들은 한반도에 대한 권리도 잃었지만, 한양에서 경성으로 이름이 바뀐 도시의 심장에는 총독부 건물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직후 그 건물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미군이었습니다. 1945년 일제가 떠난 자리에 해방군의 이름으로 들어온 미군은 총독부 건물의 이름을 중앙청 Capital Hall로 바꾸고 그 건물을 한반도 주둔 미군정의 군청 및 정부청사로 사용합니다. 

1948년 서울에서 이남 단독선거로 당선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맞은 대한민국도 미군이 넘겨준 그 건물에 그대로 드러 앉아 행정 업무를 시작합니다. 중앙청이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옛 일제의 총독부 건물이 대한민국의 본토의 첫 정부청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때 조선시대 육조거리로 불렸던 그 길에 주어진 이름이 세종로입니다.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없지만 광화문통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곳에 조선의 대왕 이름을 붙인 것이죠. 이승만 정부가 옛 조선 총독부 건물에 살림을 차린 것은 불가항력이긴 합니다. 당시에는 이 거대한 건물을 부술 수 있는 기술이나 폭탄이 조선에게는 없었고, 설령 부순다고 해도 정부 기관들이 들어갈 만한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도 당시의 경제력으로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중앙청은 계속해서 중앙정부 기관을 담아내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서울의 주인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두 번씩 총 네 번이 바뀌는 동안 북이나 남이나 서울을 점령하는 것은 곳 이 중앙청 건물을 점령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전후 서울의 복구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 서고도 한참 후 정부 기관들이 주앙청 건물 바로 앞 세종로 1번지의 정부청사 건물로 이사를 하기 까지, 조선이 세웠고 일제가 옮겼던 광화문 땅은 한반도 남쪽 권력의 최정점에 서있던 자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부청사가 세종로 1번지로 이사를 갔다는 점에서 광화문에서 육조거리로 이어지는 그 축의 정치적 중요성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많은 정부기관들이 세종시로 옮겨갔지만 세종로 1번지에는 여전히 정부청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무실을 새로 꾸리겠다고 하는 건물도 바로 이 건물입니다.




이 역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정문이었던 광화문과 그 앞에 뻗어있는 육조거리가 한반도 권력의 심장부였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이 그곳에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도 그곳이 한국 땅의 가장 큰 권력이 앉아 있는 곳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세력이 그 시대의 한반도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7년, 광화문이 복원된 이후의 세종로에는 정부 종합청사뿐 아니라 미국 대사관, 세종문화회관, KT 본사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끄트머리에 한 때는 서울시민 모두가 책을 사러 갔었었을 교보문고가 있는 빌딩이 있고 그 옆에 즈음 와서야 지하철 광화문역이 있죠. 


그런데 그 권력의 정점이 광화문 자리에 딱 한 점으로 찍혀 있었는 데 그 점이 조금씩 조금씩 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부 청사가 이사를 간 이후 총독부 건물은 박물관이 되더니, 결국엔 근정전과 육조거리를 잇는 한반도 정치의 중심축을 막고 있었던 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해체됩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02년 광화문이 다시 복원되는 과정에서 드디어 오늘날의 광화문 광장의 원형이 되는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미군이 장갑차로 인한 여고생 살인사건이 일어나 최초의 촛불이 이곳에 밝혀지기 시작한 그때와 같은 해입니다. 그리고 2008년의 촛불집회에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이 땅의 모든 권력자가 죽도록 바랬던 그 장소를, 드디어 시민이 점령합니다. 1395년 조선 개국 613년 만입니다.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내려 10여분은 족히 걸어야 만날 수 있던 실제 광화문까지의 그 넓고 긴 대로를 시민들이 매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2008년 촛불시위
처음에는 시청광장에서 시작했던 촛불이 2008년에는 드디어 광화문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러한 시민 혁명의 과정에서 광화문 광장 자신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사진 출처 : 나무 위키


그렇게 십여 년간 크고 작은 집회시위를 거치면서 시민을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맞이한 광화문은 드디어 왕복 10차선이 넘는 드넓은 대로에서 시민의 직접적 정치 참여의 장이 되는 광장으로 탈바꿈합니다. 이제는 그곳을 세종로보다 광화문 광장으로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반도 권력의 왕좌, 광화문 광장을 23주간 점령한 시민의 힘에 결국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인 줄로만 알았던 대통령, 그것도 2대째 대통령이 무릎을 꿇습니다.

한반도의 인민을 통치했던 조선왕조, 그리고 그들에게 빼앗은 권력을 이용해 지어진 일본의 조선총독부 건물. 그 거대한 권력의 물직적 실체가, 민주화 운동의 거두였던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의해 무너진 것. 그리고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 와서 드디어 다시 세워지기 시작한 광화문과 그 앞의 거리를 역사상 처음으로 차지한 시민. 역사 속에서 건물이 생기고, 도로가 뚫리고, 또 건물이 사라지는 것들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것도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의 행방을 결정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광화문 광장 같은 장소는 특히 우리 모두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간입니다. 어떤 사람이 설령 그곳에 평생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해도 말이죠.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였을 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자신의 권력이 시민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2016년 말부터 광화문 광장과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을 둘러쌓기에 이른 세력, 촛불 시민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천명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도시 공간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그 시절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말이죠, 그럼 이렇게 광화문을 시민이 점령하게 되는 것과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가 같은 시기에 딱 딱 맞물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이번 편에서는 유젠 오스만의 파리보다도 먼 역사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너무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서만 살펴본 것 같기도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바로 위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장소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곳 그 공간의 형태에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2부에서는 광화문 광장이라 불리는 그 장소에는 어떤 변화가 있어 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광화문이 시민의 것이 되는 것은 결국 광화문 그 자신이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HULBERT Homer, 1900,  "The Passing of Korea", p.379 


2편 링크 : https://brunch.co.kr/@parisboucher/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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