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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Feb 02. 2021

02. 상처를 치유하는 데 규칙은 필요하지 않다

/ 홍제천의 우울

홍제천은 북한산 문수봉과 보현봉에서 발원하여 평창동, 세검정, 홍은동, 연희동, 가좌동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홍제원이 있어 홍제원천으로도 하류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도 불리었다.

세검정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무릎을 꿇은 조선은 무려 50만 명의 백성을 청나라에 내주어야 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여자였을 것이다. 결혼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청나라는 그들의 첩이나 하인으로 부려먹으려 끌고 갔다. 상상을 해보라. 한양에서 청나라 수도 심양(지금의 선양)까지 두 달 넘게 짐승처럼 끌려다녔을 그녀들을. 지독히도 추웠을 만주 벌판을 지나 성노리개로 팔려가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부모와 형제자매를 얼마나 그리워했을지를.


청나라에 도착한 그녀들은 일정한 값어치를 치르고 팔려갔으며 팔려간 돈만큼 갚은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청나라에서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들에겐 차디찬 냉소와 차별뿐이었다. 정절을 잃은 그녀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더없이 매정했던 것이다. 한 때는 아내, 누이, 연인이었을 그녀들에겐 환향(還鄕)녀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많은 양반들은 이혼을 청구하거나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녀들을 멀리하였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당시의 권력을 쥐고 있던 소위 사대부라는 작자들에겐 일말의 양심이 있기는 한 것이었나? 조선을 지탱해온 정신이 ‘선비 정신’, ‘사대부의 기상’이라 하지만 조선을 망하게 한 이들 또한 선비이고 사대부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인조는 이런 현실을 해결하고자 홍제천에 몸을 씻으면 잃어버린 정절을 되찾을 수 있다는 포고령을 내려 환향녀에 대한 문제를 잠재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많은 여인들은 속옷 차림으로 홍제천에 뛰어들어 과거를 지우려 했다. 이러한 여인들을 회절(回節) 여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환향녀이든 회절 여인이든 많은 수의 여인들은 회복될 수 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만다. 견디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자결하거나 청나라로 되돌아갔으면 또는 어쩔 수 없이 창녀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홍제천이 흐르는 지금의 북가좌동·남가좌동의 가좌동은 가재를 한자로 음차 한 이름인데 가재울은 가재가 많이 사는 개울이라는 뜻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안산에 둘러싸인 홍제천의 물은 매우 맑았을 것이다. 그 맑은 물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뛰어들었을 여인들. 당시 조선은 무능했으며 이기적이었고 배타적이었다. 자신들의 권력 놀이에 바빴으며 어떠한 사상과 산업의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홍제천 인공폭포

살아간다는 것은 기억을 담보로 한다. 좋거나 나쁘거나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다. 누구에게나 사랑도 이별도 상처도 치유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의 그녀들 또한 예기치 못한 전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존재들이었다. 어리석은 위정자들의 책임은 그녀들에게 전가되었으며 어떠한 보상조차 없었을 것이다. 44년 전 일어난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고 비참한 삶을 연명했건만 이후 나아진 것은 없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규칙이 필요하지 않다. 공감만이 필요할 뿐이다. 어느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처럼 타인을 감정을 이입하여 감싸주어야만 한다. 우울도 상처와 같을 것이다. 혼자의 힘만으로 버거워하는 이들을 연민으로 감싸주는 행위야 말로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잘 다듬어진 홍제천변을 걸어본다. 375년 전 그녀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느끼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개울물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그녀들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는 기억의 연속성 위에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녀들의 아픔을 잊어버리면 역사는 단절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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