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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영화가 들려주는 말의 새로운 의미

들어 가며 - 나이 쉰에 영화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by 박 스테파노

쉰, 새로운 시간이 시작하는 나이


요즘 들어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쉰을 넘기자, 세상의 이치뿐 아니라 내 존재의 속살마저 점점 흐릿해진다. 예전에는 무엇이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만들었을까. 무엇 하나 분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서른 무렵에 가치관을 세운다는 이립(而立)이라는 말 앞에서는 늘 세상의 기준이 너무 늦다고 생각했다. 마흔이 되어서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며 지나갔다. 그 후 십 년 동안, 시간은 내게 무엇을 심어 놓았던가. 넘쳐나던 자신감은 어느새 뒷걸음치는 일이 잦아졌고,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피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내 삶의 의미조차 감당하기 벅찬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 쉰이라는 숫자를 안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낸다.


오십이 되고 난 뒤 비로소 또렷해진 두려움이 있다. 마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듯한 불안감. 이른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났고, 남보다 앞서 가장의 책임을 감당해왔지만, 존경할 만한 유산 하나 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 부친의 나이를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마흔 무렵 가슴에 품었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느덧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삶의 정답이라 믿어온 기준들은 응급실 천장의 형광등처럼 흔들리고 있다. 나는 지금, 그렇게 휘청이며 쉰을 살고 있다.


하지만 우울한 감정만이 내 모든 것을 잠식하지는 않는다. 오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작은 불빛들이 있다. 어느 겨울, 주린 배를 안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삼각김밥을 아무 말 없이 건네준 직원의 손길 앞에서 가슴이 뭉클했던 밤이 있었다. 십여 년간 연락조차 없던 듬직한 동창에게서 뜻밖의 응원과 도움을 받아 버텨낸 저녁도 있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지만, 글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어깨를 나란히 걸었던 누이 같은 분이 보내온 따뜻한 봄날의 위로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오십의 눈으로만 보이는 풍경인지, 혹은 굽고 휘어진 어깨와 허리가 낮아진 시선을 지탱해준 덕분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 자체로 씨네필의 자격이 있다. AI Sora


그렇다고 해서, 보인다고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동안 스쳐가듯 내뱉었던 ‘후회’, ‘사랑’, ‘용서’, ‘희망’ 같은 언어들의 진짜 속뜻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들은 비로소 그 속에 숨겨둔 속마음을 내게 털어놓는다. 어쩌면 그것들을 듣고 이해하려 애쓰는 일이, 남은 삶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소명이 아닐까 싶다. 귀를 열어 자꾸 듣다 보면, 남의 말을 고요히 받아들이는 이순(耳順)의 나이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음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從心)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주말 극장 키즈의 날들, 추억들


돌아보면,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 아버지는 중동의 뜨거운 태양 아래 파견 노동자로 일하셨다. 1년에 한 번, 보름 남짓한 여름휴가가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되면 학교 공부가 일상을 꽉 채우고, 사업 부도 후에는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도생해야 했던 청춘이었다. 가까스로 취업하여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명절에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와의 선명한 기억이라곤 유년기의 아주 짧은 여름방학뿐이다. 넉넉지 못했던 시절, 아버지가 휴가를 나오면 텐트와 코펠, 버너를 짊어지고 가족과 함께 온갖 풍경을 찾아 전국을 누비셨다. 남은 시간에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슈퍼맨> <스타워즈> <죠스 > <스타워즈> <죠스> 같은 블록버스터는 물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아웃 오브 아프리카> <칼라 퍼플> 같은 묵직한 작품들까지 함께 보았다. 당시엔 국민학생 관람 불가 등급의 영화라도 부모가 함께라면 극장 직원이 묵인해 주던 시절이었다.


주말 저녁,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어주세요”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와도 우리는 불을 끄고 14인치 브라운관 앞에 나란히 누워 『주말의 명화』『명화극장』을 함께 보곤 했다. 무엇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길>에 나오는 젤소미나의 죽음을 예감하게 하는 잠파노의 눈물 앞에서 나도 함께 울었다. <대부> 속 말론 브란도의 볼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다음 날까지 아버지를 붙잡고 물었던 날도 기억난다. 아버지가 중동에서 아껴 모은 체류비로 구입한 SONY 베타 비디오플레이어는 면세 배송으로 우리 집에 도착했고, 그 작은 기계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주말이면 안방 극장이 개봉했다. AI Sora


50이 너머 보이는 영화의 말들


오십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니, 익숙했던 영화들이 전혀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소년기의 감탄과 청년기의 몰입으로만 채웠던 장면들이, 이제는 ‘침묵’ 과 ‘여백’으로 내게 다가간다. ‘보다’라는 행위가 감각을 넘어 ‘읽기’의 차원으로 전환된 듯하다. 과거에는 서사에만 눈이 갔지만, 이젠 등장인물의 주름진 눈매, 카메라가 응시하는 몇 초간의 정적, 배경으로 흘러드는 빛의 온도가 먼저 마음에 스며든다. 이는 삶을 지나는 내 속도와 체온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길>의 젤소미나는 더 이상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내게 잃어버린 감성의 예언자로 다가온다. 침묵하는 잠파노는 타인의 고통을 비로소 늦게 깨닫는 인간 존재의 무거운 역설로 읽힌다. 그들의 말 없는 마지막 장면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너는 타인의 고통을 늦더라도 응시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마음의 폐허를 떠돌고 있는가.”


젊은 날엔 이야기를 소유하려 했지만, 나이 든 지금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 차이는 단순히 세월이 만든 피로가 아니다. 세계를 해석하려는 언어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무엇을 말하느냐’에 집착했다면, 지금은 ‘무엇이 말하지 않는가’에 더 귀 기울인다. 영화는 이제 해답 대신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나를 단련시킨다. 언어는 때로 침묵으로 더 깊이 말을 전하고, 진실은 드러나는 대신 스며들기를 택한다.


오십의 나는 영화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보다, 스쳐 지나간 대사 한 줄에 며칠이고 마음을 붙들린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속, 아버지가 아이를 위해 아침 식탁을 정성스레 차리는 반복된 장면은 이제 나에게 실존적 행위로 다가온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고, 책임의 무게이기도 하며, 무너진 일상의 틈을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는 인간의 몸짓이기도 하다. 쉰의 나는 영화를 더 이상 극적인 전환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장면 속, 그들이 딛고 서 있는 작고 낡은 방의 바닥, 무심히 흐르는 라디오, 흘러간 시간의 진동 속에 시선이 머문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비로소 살아온 시간만큼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철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가 말했듯, ‘보는 행위’는 단순한 인지나 재현이 아니라 세계에 몸을 걸치는 일이다. 영화는 바로 그 ‘몸’의 기억을 불러낸다. 나의 과거와 현재, 실패와 고백, 부끄러움과 회한이 장면 사이에 숨어 있다가 문득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 영화는 나의 기억이자 나의 고백이며, 나의 고해다.


이제 나는 ‘영화를 본다’는 말을 감히 ‘영화를 읽는다’라고 바꾸고 싶어진다. 그것은 더 이상 소비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자세다.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지금·여기를 읽어내는 훈련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야기로 삶을 엮고, 영화로 그 삶을 비추며 반추한다. 영화는 기억의 거울이고, 상실의 부표이며, 다가올 언어의 징후다.


영화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AI Sora


지금 왜? 영화 이야기인가


안방극장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공간이었다. <벤허>, <쿼바디스>, <스파르타쿠스>, <빠삐용>, <영광의 탈출>, <대부> 같은 마스터피스부터 존 웨인으로 대표되던 서부극, 그리고 <슈퍼맨>과 <스타워즈>로 이어지는 블록버스터의 효시에 이르기까지—화질이 조악한 작은 상자 속 세상은 제게 무한한 상상력을 선물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텔레비전은 ‘총천연색’ 컬러로 변모했고, 브라운관은 14인치에서 20인치로 커졌으며, 그 옆에는 비디오 리플레이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 구독하던 ‘보물섬’과 ‘어깨동무’는 어느새 <스크린>이라는 잡지로 바뀌었고, 그 속에서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제니퍼 코넬리 같은 은막의 여신들을 만났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이후엔 작은 보상처럼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을 만나기 위해 강남 ‘동아극장’을 찾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에게 처음 ‘스크린’은 극장이 아니라 안방극장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그것을 직업으로 삼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코로나 이전까지는 주요 개봉작을 거의 빠짐없이 챙겨보았고, 일기처럼 남기던 감상문은 점차 리뷰가 되어 제법 장문의 기록으로 쌓여갔다.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의 시대가 열리면서 영화는 물론 시리즈 드라마도 자유롭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영화를 다시 꺼내보며 추억과 감상을 되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는 내게 또 다른 ‘시네마 천국’이 된 듯하다. 7인치 남짓한 작은 휴대폰 화면조차 하나의 스크린이 되는 세상은 분명, 영화를 사랑하는 이에게 축복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뭐 그리 대단해?"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 영화는 단지 오락이 아니다. 영화는 이야기이고, 그림이며, 음악이다. 때로는 읽지 않아도 읽히는 역사책이 되고, 오래된 짝사랑과 소중한 추억의 저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시대정신을 품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시간 배경이 언제든 간에, 영화 속 이야기들은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질문으로, 어떨 때는 묵직한 잔상으로, 또 어떤 때는 말 없는 외침으로 말이다. 그것이 코미디든, 멜로든, 액션이든, 하드보일드든, 심지어 애로 영화든 상관없다. 영화는 개봉 당시의 시대, 그리고 그것을 다시 꺼내보는 현재의 우리와 늘 조우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며, 영화가 시대정신의 거울이라 믿는 이유다.


영화 관련 글을 쓰겠다는 말이 다소 장황해졌다. 물론 소개와 리뷰의 기능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욕심이 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의 다채로운 단면을 읽고자 하는 욕심이다. 블로그를 둘러보면, 줄거리 요약에 스틸컷만 잔뜩 붙여놓은 포스팅이 주류를 이룬다. ‘인플루언서’라는 타이틀을 달고서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영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작품을 만든 수많은 이들과, 그 안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품은 이야기들에 미안해진다.


영화를 읽고 쓴다는 것은. AI Sora



대항해의 시대처럼 기억 속 숨은 보물을 찾아


요즘 극장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영화라는 콘텐츠는 오히려 그 수를 늘려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채널의 확장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는 장르도, 주제도 훨씬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영화의 생애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한때 영화 리뷰가 트렌드를 선도하는 수단이 되었다면, 이제는 그 모든 트렌드를 쫓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OTT 플랫폼에 올라오는 화제작만 챙기기에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니까.


그래서 생각한다. 지금 영화 리뷰어가 할 수 있는 진짜 역할은 새로운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간 영화들 속에서 진짜 가치를 발견하고, 잊힌 작품들의 내면을 다시 조명하는 일이 아닐까 하고. 마치 북극해에 가라앉은 타이타닉을 탐사하듯, 빠르게 소비되고 잊혀진 영화들 속에서 진주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오늘의 영화 리뷰어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비교적 조명을 받지 못한 영화들, 크게 흥행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오래 남았던 영화들 속 말뜻을 찾아 엮어 보려 한다. 영화는 언제나 시대와 세상과 대화하고 있지만, 이어폰을 꽂은 이 세계의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을 귀를 닫고 살아간다. 조금만 귀를 기울인다면, 조금만 시간을 들여 되새긴다면, 우리는 분명 더 넓은 시선과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믿음을 안고, 오래전 끄적여둔 노트 몇 페이지를 다시 펼쳐본다.


쉰이 되어 다시 마주한 영화들은 더 이상 과거의 위안이나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생의 주석이고, 시대를 읽는 밑줄이다. 영화 속 침묵의 주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나지막이 묻는다. “너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로도 영화는 살아 있으며, 아니, 나를 다시 살게 한다.


치열하게 살아내던 마흔 즈음부터 끄적였던 영화 이야기들을 그러 모아 조금 더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본다. 영화의 말들이 내게 다가와 세상의 눈이 되었으므로, 그들을 증거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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