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표절과 모방의 줄타기-복제와 생성

- Ⅳ부. 배반의 시간: 눈, 권력, 진실성의 해체

by 박 스테파노

도용된 울림, 생성의 그림자


작가 클레이 해먼드(데니스 퀘이드)는 청중 앞에서 자신의 신작 소설을 낭독한다.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단조롭고, 낭독은 글의 무게를 덜어내는 대신 지루함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한 젊은 작가 지망생의 야망과 죄의식이 서서히 펼쳐진다.


소설 속 로리 잰슨(브래들리 쿠퍼)은 번번이 출판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재능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가 가진 것은 도라(조이 살다나)라는 사랑뿐이다. 파리 신혼여행에서 도라가 선물한 낡은 가방 속, 오래된 원고가 발견된다. 종이에 적힌 언어는 너무도 생생했고, 그의 심장을 사로잡는다. 로리는 그 글을 랩톱에 옮겨 적는다. 타인의 목소리를 베껴 쓰는 순간, 선택은 이미 끝나 있었다.


도라는 로리의 작품으로 믿고 출판을 권한다. 원고는 출판 즉시 성공을 거두고, 로리는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는다. 센트럴 파크에서 만난 노인(제레미 아이언스)은 로리에게 잃어버린 삶을 들려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청년(벤 반스)으로 살던 시절, 셀리아(노라 아르네제데르)와 사랑에 빠졌으나 전쟁과 상실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고통 속에서 청년은 소설을 썼고, 그 원고가 바로 로리가 도용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표절을 잠시 빌렸다 생각하기도 한다. AI Sora


노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목소리의 귀환이며, 종이에 새겨진 문장들은 고통과 상실, 사랑의 회한으로 점철된 생애의 증언이다. 로리는 그 목소리를 빼앗아 자신의 입술에 얹었고, 그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잃기 시작한다. 표절은 단지 법률적 범죄가 아니라, 존재의 침식이다.


〈더 스토리: 세상에 숨겨진 사랑〉(The Words, 2012)의 결말은 모호하다. 클레이의 낭독을 듣던 대니엘라(올리비아 와일드)는 이야기가 클레이 자신의 삶과 겹친다고 의심한다. 클레이는 삶과 허구가 가까이 있지만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관객은 안다. 목소리의 도둑질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임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오래된 예술 논쟁을 소환한다. 모방은 창작의 근본적 방법이지만, 표절은 다르다. 모방은 변용을 전제로 하지만, 표절은 도용의 침묵을 강요한다. 타인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가장하는 순간, 창작은 죽음에 이른다.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우리는 무수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지브리풍으로 변환되는 풍경을 목격한다. 평범한 인물의 사진이 애니메이션의 질감으로 덧칠되고, 일상의 풍경이 어느 순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처럼 번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브리가 아니다. 미야자키의 세계를 지탱한 목소리, 기억과 시대적 체험, 노동과 집념의 시간은 지워진 채, 남은 것은 스타일의 껍질뿐이다.


〈더 스토리〉 속 로리가 노인의 원고를 옮겨 적었듯, AI는 인간이 쌓아 올린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데이터로 삼아 새로운 문장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새로운 목소리가 아니다. 기존 목소리를 지운 자리에서 합성된 환영일 뿐이다. 로리가 노인 앞에서 느낀 죄책은, 오늘날 우리의 자리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AI가 재현하는 것은 목소리의 울림이 아니라, 흔적이다. 창작자의 삶과 체험이 응축된 문장, 예술가의 고통이 스며든 선과 색은 통계와 패턴으로 환원된다. 표절과 모방의 경계에서 인간 창작자의 음성은 점점 희미해진다. 두려움은 단지 경제적 손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목소리의 상실, 고유한 존재의 증언이 사라지는 데서 온다. 〈더 스토리〉에서 로리가 잃은 것은 명예 이전에 자기 자신이었다. AI 시대의 두려움도 다르지 않다. 목소리 없는 작품, 환영만 가득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AI Sora


영화의 마지막, 로리는 도라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도라가 사랑한 것은 로리의 진실이 아니라, 도용된 목소리의 영광이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할 때마다 코가 자라듯, 로리의 거짓은 삶 전체를 휘감았다.


AI가 만들어내는 스타일 재현은 이 오래된 신화를 다시 불러온다. 기계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가 빚어내는 환영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속인다. 목소리의 진실을 잃은 세계, 아우라 없는 복제의 시대. 표절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창작자의 경제적·정체적 가치가 흔들리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창작자 공동체는 이 새로운 시대에 어떤 규범을 세울 것인가.


〈더 스토리〉가 남긴 울림은 단순한 도덕극이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빼앗을 때, 동시에 자기 목소리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말한다. 기계의 환영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법적 권리 이상의 것, 창작자의 존재와 목소리 그 자체다.



모방과 창조의 전통, AI와의 교차점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아르스 포에티카(시학, Ars Poetica)』는 모방을 미덕으로 단순히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형식과 목소리를 따라 배우는 일과, 그 한계를 넘어 경쟁하고 변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을 구별했다. 이미타티오(모방, imitatio)가 시작이라면, 에뮐라티오(변용, aemulatio)는 윤리이자 미학적 과제였다. 창작자는 선행자의 문장을 복제하는 자가 아니라, 심장 안에서 재구성하는 자로 상상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모방을 단순한 베낌으로 보지 않았다. 페트라르카와 에라스무스적 전통은 고전을 반복하기보다 내면화하여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는 것을 모방의 미덕으로 삼았다. 이들은 모방을 창조적 전유(appropriation)로 이해했고, 학습과 흡수가 변형과 윤리적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모방은 시간과 체험, 필사의 반복을 통해 목소리를 숙성시키는 과정이었으며, 단순한 기술적 재현을 넘어 존재적 선택과 경험의 흔적을 담는 행위였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저자의 개인적 권위를 텍스트와 언어의 장으로 옮기며 창작의 주체를 해체했다. 텍스트가 언어의 연쇄 속에서 생성될 때, 누가 목소리의 책임을 지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오늘날 생성형 기계가 이미 죽은 저자의 흔적을 무한히 증폭할 때 우리는 ‘저자의 죽음’이 아니라 ‘저자의 유령’을 목격하게 된다.


이 시선은 자연스럽게 저작권과 저작자성 문제로 이어진다. 전통적 저작권 체계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을 통해 창작자의 경제적 권리와 인격적 권리를 보호했다. 인간의 모방은 영감과 변용 사이를 오가며 출처와 각주로 책임을 지었지만, 데이터 기반 학습을 하는 기계는 출처를 기록하지 않고 패턴만을 흡수한다. 스타일은 통계적 흔적으로 재현될 수 있으나, 목소리는 삶의 체험과 선택, 시간의 농축으로 이루어진 존재적 표지로 남는다. AI는 전자를 모사할 수 있어도 후자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고? AI Sora


생성형 AI가 스타일과 목소리를 재생산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확률과 근접성의 문제다.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공진에서 특정 패턴을 추출해 응답을 조립하는 방식은 호라티우스가 요구한 에뮐라티오와는 다른 작동 법칙을 가진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윤리적 선택을 하고 타자의 노동과 고통을 인지할 수 있지만, 기계는 판단을 자체적으로 내리지 못한다. 동일한 결과물로 보이는 텍스트나 이미지가 법적·윤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현장의 난점이다.


법적 쟁점은 다양하다. 학습 데이터의 무단 활용, 원저작물 표시와 동의 문제, 생성물의 저작자 귀속 여부, 저작인격권 침해 가능성, 스타일 모방으로 인한 시장적·정체적 피해 등이 논의된다. 윤리적 차원에서는 창작자의 자율성과 목소리의 온전성, 공동체적 문화 자본의 공정한 분배가 문제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별의 요구다. 인간의 에뮐라티오와 기계적 재현을 동일선상에 놓지 않고, 각 행위가 어떤 책임을 수반하는지 명확히 규범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무겁다. 우리는 모방을 여전히 창작의 한 방식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전유되고 공평하게 관리될 것인지 새로운 규범을 세워야 한다. 호라티우스의 에뮐라티오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유 개념은 기준을 제공하고, 바르트의 텍스트 중심 통찰은 AI 시대의 저작권과 저작자성 문제를 재구성할 때 새로운 숙고를 요구한다. 그 숙고는 법률과 윤리, 예술적 상상력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창작자의 전유와 기계의 재현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창작의 구조적 환경 자체를 흔든다.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학습하고 재조합하며 새로운 산물을 내놓는 기계는, 인간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 문제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낸다. 학습 과정에서 원작자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통계적 흔적으로 흡수하지만, 인간이 체득한 시간과 체험, 내면화와 선택은 소유하지 못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갈등은 단순한 도덕 논쟁을 넘어, 저작권과 창작자성, 문화적 책임이 얽힌 현실적 문제로 드러난다.


미국에서는 이미 법정에서 이러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서스 길드 대 오픈AI(OpenAI) 소송은, AI가 공개된 문헌을 학습할 때 저작권 침해가 발생하는지를 핵심 쟁점으로 삼았다. 작가, 시각예술가, 프로그래머들이 제기한 유사 소송은, AI 학습과 생성물 사이의 권리 귀속 문제를 다루며, 원저작자와 생성물의 저작자성을 구분하고자 한다.


시각예술에서는 사라 앤더센 등 작가들이 독창적 그림체와 목소리를 동의 없이 학습한 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브리 스타일’ 논란처럼, 사용자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화풍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도록 요구할 때 발생하는 무단 복제 문제는 창작자의 권리와 윤리, 시장과 공동체적 문화 자본의 공정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AI의 학습 방식은 통계적 패턴과 근접성 계산에 의존한다. 기계는 데이터를 흡수하고 유사성을 기반으로 결과물을 조립하지만, 인간 창작자가 모방과 변용, 전유를 통해 쌓아 올린 시간과 체험, 선택의 무게를 담지 못한다. 표면적으로 유사한 텍스트나 이미지라도 법적·윤리적 동일성을 담보하지 못하며, 판단과 책임은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저작권법이 보장하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이 AI 환경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스타일 모방과 창작자 목소리 재생산이 사회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새롭게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자기 모방도 표절의 한 가지다. AI Sora


법적 논의는 학습 데이터 무단 활용, 원저작물 표시와 동의, 생성물의 저작자 귀속, 저작인격권 침해 가능성을 교차한다. 윤리적 차원에서는 창작자의 자율성과 목소리의 온전성, 공동체적 문화 자본의 공정한 분배가 문제로 부각된다. 인간은 변용을 통해 윤리적 판단과 선택을 수행하지만, 기계는 단순히 패턴을 재조합할 뿐 판단하지 못한다. 이 격차가 AI 생성물과 인간 창작물 사이 법적·윤리적 긴장의 핵심이다.


결국 오늘과 미래의 창작 환경은 인간 중심 윤리, 법적 기준, 기술적 가능성 사이에서 재편될 수밖에 없다. 규범과 법적 판단은 인간의 모방과 변용, AI의 통계적 재생산을 명확히 구분하고, 각 행위가 수반하는 책임과 권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 AI는 스타일과 패턴을 재현할 수 있어도 목소리와 경험, 윤리적 선택을 소유하지 못한다. 이 한계와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 향후 저작권 소송과 정책 결정, 창작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인간 창작자가 체득한 시간과 선택, 내적 체험은 단순 재현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AI는 그 흔적을 따라 흉내 낼 뿐이라는 현실을 법적·윤리적 논의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모방과 변용, 전유의 전통이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함을 확인한다. 호라티우스의 변용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창조적 전유는 단순 모방을 넘어 윤리적 책임과 미학적 선택을 수반했다. 오늘의 AI가 보여주는 통계적 재생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제시한 텍스트 중심 창작의 해방이 AI의 무한 복제와 만나며 ‘저자의 유령’ 문제를 낳듯, 우리는 기술과 법, 윤리, 미학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숙고하며 새로운 기준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 창작자의 목소리와 경험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존재적 표지로 남으며,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법과 문화 정책, 창작 환경을 정의하는 필수 조건이다.



아우라 상실의 시대


인문학적 고찰에서 ‘모방’의 윤리는 단순히 법률적 쟁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창작과 재현을 저작권과 소유권의 문제로만 보는 시선은 예술의 근본적 의미를 놓치게 한다. 타자의 목소리를 도용하는 행위는 기술적 복제를 넘어 존재론적 침해로 읽힌다. 목소리의 도용은 인간적 경험과 감각을 통과한 언어적·형식적 결의를 단절시키며, 그 과정에서 창작자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탈락한다. 예술사에서 재현과 변형의 문제는 늘 논쟁의 대상이었다. 회화, 문학, 음악, 조형 예술 모두에서 ‘모방’과 ‘독창’ 사이의 긴장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 반복되었다. AI 기술은 이 논쟁을 새로운 스펙트럼으로 확장하며, 기존 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발터 벤야민이 「기계적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논한 핵심은 아우라의 상실과 민주화된 재현이었다. 원본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될 때, 시간적·공간적 단일성과 작품의 권위는 소멸한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는 작품 고유성과 현존의 긴장을 지칭하며, 인간은 이를 통해 작품과 감각적으로 만난다.


AI 이미지와 텍스트 생성 기술은 이 논지를 새로운 차원으로 구현한다. ‘지브리풍’ AI 변환 사례처럼 스타일과 형식을 모방하지만, 작품 고유의 아우라는 제거된다. 기술은 시각적·언어적 패턴을 전수하지만, 살아 있는 경험과 존재론적 호흡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는 단순한 기술적 한계를 넘어, 감각적 경험의 결핍과 창작 행위의 본질적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있다.


재미있으면 괜찮은걸까?AI Sora


아도르노가 지적한 문화산업의 반복 생산과 개별 작품의 고유성 소멸은 오늘날 AI 기술과 맞물리며 극단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끊임없이 재조합하며 스타일과 문체를 흉내 내고, 표절과 모방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예술의 고유한 경험과 형식의 존재론적 의미는 배제된 채, 패턴과 확률만 남는다. 이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창작과 수용, 존재와 재현의 근본적 윤리를 시험하는 문제다. AI가 생성하는 결과물은 외형적 유사성만 남기며, 인간적 감응과 시간적 맥락, 행위로서의 모사의 체험을 결여한다.


AI의 모방은 표면적이고, 시간적·공간적·감각적 체험을 매개하지 않는다. 재현은 존재와 호흡하며, 행위와 경험을 거쳐 의미를 획득한다. 기계는 단순히 데이터와 확률 계산으로 이를 대체할 뿐이다. 창작의 윤리적·존재론적 핵심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적 경험과 반복, 변형 과정에 있다. AI 시대 모방은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만, 예술적 아우라와 감각적 상호작용을 배제하며, 인간 존재와 창작 행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모방의 윤리는 법률적 판단보다 깊은 존재의 문제와 맞닿는다. 타인의 형식과 언어 사용은 잠재적 침해를 내포하지만, 동시에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인간 창작은 모방으로 시작하고, 재현을 통해 존재를 검증하며, 변형으로 독자적 의미를 구성한다. AI는 이를 대체할 수 없으며, 형식과 외형적 유사성에 머물 뿐 존재론적 호흡과 감각적 공명을 담지 못한다. 따라서 AI와 모방의 윤리는 법적·기술적 측면을 넘어, 존재와 경험, 아우라와 재현의 차원에서 사유해야 한다.


최근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 사례는 IP 논쟁과 맞닿는다. 법률적 문제 여부와 별개로, 기술 윤리와 존재론적 질문이 겹친다. 학생들이 AI를 활용해 과제물을 만들 때도 기술 자체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창작자의 의도이며, 이는 법이 아닌 윤리의 영역이다. 기술 편의가 다수에게 유리하게 작동할 때, 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로 흘러갈 수 있다.


국제적 상황을 보면, 미국은 스타일과 아이디어 보호가 느슨하고 AI 산업을 우선한다. 유럽은 엄격하며 ‘옵트 아웃’ 제도로 저작자를 보호한다. 한국은 입법과 사법이 마비 상태이며, AI 윤리 기준도 마련되지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희망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현실은 윤리적 고민으로 수렴된다.


윤리는 단순한 규율이 아니다. AI 산출물이 사회적 가치와 인권을 존중하며 활용되는지, 창작자와 사용자가 공정하게 다루어지는지에 관한 논의가 윤리다. IEEE(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 전기전자공학자협회)는 AI를 ‘자동 지능 시스템’으로 명명하며, 설계 단계부터 윤리적 원칙 반영을 강조한다. AI가 만들어낸 창작물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표절, 도용, 무단 복제는 AI 때문이 아니라 창작자의 의도와 행위 때문이다. AI는 인간 사회의 불공정과 편향을 학습하고 확률적 조합을 할 뿐이다. 지브리풍 생성이 공익적인지, 편의와 자기 기만인지 판단하고, AI 사용 허용 여부를 합의하는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


자신의 산출물이라는 확신은 환각이 되어간다. AI Sora


결국 AI 윤리 논의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 창작과 사용의 의도, 그 행위의 사회적 함의를 묻는 일이다. 법과 제도로 단순히 통제될 수 없으며, 심층적 사유와 지속적 논쟁, 문화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AI는 도구일 뿐, 창작과 공정성, 윤리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모사, 닮음에서 존재로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벽면에 붙은 커다란 모과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케치북 위에 이미지를 그려야 했다. 단순히 따라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교과서 위 그림을 아홉 칸으로 나누라고 하셨다. 전체를 닮기 위해 먼저 전체를 보지 말라는 말이었다. 칸마다 다른 비율과 곡선, 그림자 한 점의 방향까지 하나씩 베껴 그리는 일. 손끝의 연습이 아니라 눈의 훈련이었고, 마음의 감각을 바꾸는 일이었다. “예술은 모사에서 시작돼. 보라, 그리고 다시 그려라. 본다는 건 흉내가 아니라 닮아보려는 마음이니까”라는 말이 지금도 귀에 남는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루브르 박물관의 풍경이 겹쳐진다. 명화 앞에 스케치북을 펼친 사람들, 모나리자 앞의 밀물 같은 인파 너머, 루벤스나 다비드의 대작 앞에 조용히 앉은 이들. 붓을 들고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언의 대화 속에 있는 사람들, 루브르에서 ‘카피스트(copiste)’라 불리는 이들이다. 정식 허가를 받아야 하고, 작품과 매체, 크기와 기간까지 신청해야 하며, 유화는 금지되고 원본과 같은 크기로 그릴 수 없다. 제한은 모사를 창작에 가깝게 만든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도, 스페인의 프라도,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내셔널 갤러리, 이탈리아 우피치까지 ‘모사하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준다. 그들은 거장의 결을 눈으로 좇고 손끝으로 되짚으며, 단순한 재현을 넘어 회화의 언어를 통과한다. 피카소, 마네, 세잔, 앵그르도 젊은 시절 거장의 앞에서 붓을 들며 시선과 구도를 닮아보았다. 단순히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다시 그려내며 배웠다.


모사는 단지 닮는 일이 아니라 ‘살아보는 일’이다. ‘모(模)’는 본을 뜨는 일로 형상뿐 아니라 구성과 균형, 시간의 감각까지 담고, ‘사(寫)’는 손으로 베끼는 행위지만 손의 기술이 아니라 정신을 옮기는 방식이다. 모사는 형식과 정신을 함께 옮겨 심는 실존적 재현이다. 반복이 아니라 변주, 재현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기, 존재의 껍질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리듬을 울려보는 일이다. 문학에서도 모사는 창작의 근원적 방식이다.


중세 수도원의 스크립토룸은 필사의 공간이었다. 책을 따라 쓰는 필사는 모사의 전 단계일 뿐, 문장과 어휘의 표면을 따라갈 뿐 그 속의 호흡과 시선을 가늠하지 못한다. 반면 모사는 특정 문장을 읽고 해체해 자신의 언어와 경험으로 재구성하는 행위다. 하루키의 문체로 상실을 말하고, 김훈의 호흡으로 침묵을 붙잡는 일.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니라, 타자의 말투로 나를 말해보는 수행이다. 김연수는 하루키를 모사했고, 김훈은 좋은 문장을 베끼며 문장이라는 숨을 익혔다. 모사는 형식의 연습이 아니라 감각의 훈련이며, 존재의 내력에 귀 기울이는 방식이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전승과 변용의 발전을 이룬다. AI Sora


오늘날 AI는 모사하지 않는다. 거대언어모델은 인간 문장을 학습해 그럴듯한 조합을 만들어내지만, 사유 없는 패턴의 재배열일 뿐 손의 기억, 눈의 떨림, 마음의 흔들림은 없다. AI는 반복된 계산을 할 뿐 인간을 모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간은 복합적이고 사유적인 창작에서 멀어질 수 있다. 모사는 삶을 살아낸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예술적 윤리다. 그림 앞에 오래 앉아 본 자, 문장을 쓰며 멈춰 선 자, 타인의 형식을 통과한 자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흉내가 아니라 공명이고, 반복이 아니라 변주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존재론적 행위다.


중학교 미술 시간, 내 손은 단순히 그림을 따르지 않았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균열을 내고, 무엇을 본다고 여겼는지 되묻는 연습이었다. 아홉 칸의 구획은 관찰과 인식의 질서를 훈련하는 장치였고, 모과의 음영 하나하나는 나와 세계 사이 감각의 관계를 되짚는 지도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세우며 침묵을 배치할 때마다, 세계와 존재를 다시 그려보는 모사적 행위다. 창조란 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형체와 시간, 고통과 사랑, 타인의 문장과 나의 기억을 다시 보고 말하고 살아내는 과정이다.


모사는 재현이 아니라 구현이다. 감각의 되살림이며 생명의 이입이다. 타인의 형식에 몸을 싣되 나의 호흡을 발견하고, 거리를 유지하되 사랑하며, 닮되 흡수되지 않는 글쓰기이자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닮기 위해 그리는 것’과 ‘그리기 위해 닮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 질문의 틈에서 예술은 시작되고, 작가는 그 틈을 오래 바라보는 자다.



피노키오와 메나르 사이에서


표절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한 법적 문제나 창작물의 경제적 손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창작을 어떻게 규정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적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흔히 AI가 만들어낸 텍스트나 이미지에서 ‘표절’을 탐지하려 하지만, 그 근본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의도 속에 있다.


피노키오의 신화가 남기는 역설적 상징은 흥미롭다. 목소리 없는 인형이 거짓말을 통해 인간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소리 도용’과 창작의 윤리적 긴장과 맞닿는다. AI가 생성한 이미지나 문장은 목소리 없는 인형처럼 인간 세계에 편입되지만, 스스로 판단하거나 공명을 경험하지 않는다. 표절과 모방, AI의 생성물은 단순한 형태의 재현일 뿐, 존재론적 주체성과 감응은 결여되어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은유를 발견한다. 무한한 지식과 힘을 악마적 계약으로 얻는 대가가 영혼이라는 사실은, 기술적 도구를 활용하는 창작자가 놓치기 쉬운 본질을 경고한다. AI와 창작자의 관계는 이 계약과 닮았다. 도구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창작자의 윤리적 판단과 존재적 책임을 대신하지 않는다. 기술이 제공하는 무수한 가능성과 속도는 창작의 진정한 내적 노동을 가릴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주체적 선택이 사라질 위험을 품는다.


보르헤스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보여준 창작의 역설은 더 큰 울림을 준다. 같은 텍스트를 반복하지만, 맥락과 경험이 달라지면 전혀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인간은 재현 속에서 자기를 투영하며, 새로운 해석과 맥락을 만들어낸다. 반면 AI는 입력된 데이터와 확률적 조합에 따라 결과를 도출할 뿐, 맥락의 경험을 갖지 않는다. 그 차이는 ‘진짜 도전’과 단순한 생성물 사이를 가른다. 피에르 메나르가 보여준 창작의 진수는 경험과 의도, 존재의 흔적 속에서 비롯된다.


AI는 피에르 메나르가 될 수 없다. AI Sora


AI가 창작에 개입할수록, 우리는 ‘의도’를 재검토해야 한다. 기술이 결과물을 내는 과정에서 인간의 윤리와 선택은 배제되지 않는다. 창작자가 학습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자신의 판단을 결합해 AI를 사용할 때 비로소 산출물은 인간적 맥락 안으로 들어온다. 반대로 의도 없는 편의나 손쉬운 대체는 비윤리적이며, 표절적 요소를 내포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 책임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공정성과 의도다. AI가 만들어낸 텍스트나 이미지는 인간 공동체가 정한 윤리적 기준과 문화적 공감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산출물이 공정한지, 인간적 맥락을 존중하는지 판단하는 일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몫이다. 윤리적 판단 없이 AI를 편의로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창작의 의미와 책임을 희생하게 된다. AI와 창작의 관계를 논할 때, 기술의 가능성과 편익보다 인간의 의도와 맥락, 존재적 주체성을 먼저 살펴야 한다.


표절의 공포와 AI의 편의는 겉으로는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인간이 창작 공동체에서 자신과 타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존중하고, 살아낸 흔적을 담아낼 것인가와 맞닿는다. 피노키오, 파우스트, 피에르 메나르가 남긴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 창작과 윤리, 인간적 책임을 되묻는 성찰이며, 기술에 의존하기 이전 인간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존재론적 검토다. AI가 무엇을 만들어 내든, 그 의미와 책임은 결국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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