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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

깊이 읽기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by 박 스테파노

경영컨설턴트이자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그의 대표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디지털 시대에 퇴화하는 인간의 뇌 기능을 경고했다. 15년 전 그의 주장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예언에 가까운 통찰이었다. 그는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아이패드 같은 도구들이 우리의 사고 능력을 서서히 침식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IT 기술의 발전과 함께, 스마트 기기와 SNS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인류의 지식 습득 방식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손 안의 ‘스마트’한 기기로 몇 분 만에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시대가 도래했다. 깊은 사유보다 효율과 속도가 더 큰 가치를 차지했고, 정보는 이미 우리 곁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흐름은 시간의 선형적 질서를 초월해, ‘가속의 현실’로 치닫고 있다. 바로 AI로 대표되는 인지 컴퓨팅의 고도화와 대중화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전례 없는 변동을 겪고 있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깊은 생각’의 퇴화가 있다. 우리는 ‘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여기는 것’을 혼동하며, 이는 AI의 환각 작용과 유사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콜라스 카는 문자와 글쓰기가 인간의 깊은 사고를 고도화했다고 말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까지도 문자 언어는 여전히 구술 전통의 그림자 속에 있었으며, 독자들의 내면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면서 글을 읽고 쓰는 이들이 늘어났다. 수도사, 학생, 상인, 귀족들이 새로운 독자층을 이루었고, 책에 대한 접근 또한 폭넓어졌다. 그 시기 출판된 책의 다수는 학문서가 아닌 기술과 실용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공연처럼 낭독’하기보다, ‘혼자 조용히 읽고 싶어’ 했다. 독서는 점차 개인적 성장의 수단이자 사유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는 알파벳의 발명 이후, 문자 문화에 가장 중대한 전환이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대표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 청림출판


기원후 1000년 무렵, 작가들은 자신들의 글에 어순의 법칙을 도입해 예측 가능한 통사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필경사들은 문장 사이에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들을 구분했다. 이 변화는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3세기경에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띄어쓰기 없는 연속된 문체—가 점차 사라졌고, 구두점이 보편화되면서 독서는 한층 편리해졌다. 이제 글쓰기는 듣기 위한 행위에서 보기 위한 행위로 이행하고 있었다.


이 변화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단어의 순서가 규범화되면서 언어 구조 자체가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중세문헌 서지학자 폴 생거(Paul Saenger)는 이를 “운율과 리듬이 살아 있는 고대 웅변 전통에 정면으로 반하는 사건”이라 말했다. 띄어쓰기는 문자를 해독하는 인지적 부담을 줄였고, 독자들은 훨씬 더 빠르고 조용하며 깊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은 학습의 결과였다. 젊은 독자들의 뇌가 글을 읽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복잡한 신경 회로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뇌가 문자를 해석하는 데 점점 능숙해지면서, 과거엔 고도의 집중과 노력이 필요했던 과정이 자동화되었다. 그 덕분에 뇌는 남는 에너지를 의미의 해석에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날 ‘깊이 읽기’라 부르는 독서 방식이 가능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생거는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가 독서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바꾸며, 독자의 지적 능력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평범한 독자들도 점점 더 빠르게, 더 어려운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독서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자들은 집중력을 기르고, 책 속으로 몰입하는 능력을 키워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몰두할 수 있는 정신적 근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은 본래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산만하며, 주위를 살피고 시선을 끊임없이 이동시키는 특성을 지닌다.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하향식 주의(Top-down attention)’와 대비되는 ‘상향식 주의(Bottom-up attention)’로 설명한다. 2004년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실린 한 논문은 “감각은 받아들일 자극이 있을 때, 뇌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로 재빨리 주의를 옮긴다”고 설명한다.

띄어쓰기는 깊게 읽는 능력을 주었다. 한겨레 신문


니콜라스 카는 이때 주의를 붙잡아 두는 장치로서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어 사이의 간격이란 사소한 기술이, 인간의 뇌가 집중하고 사유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준 것이다. 즉, 문자와 문장 사이의 ‘틈’이 바로 생각이 자라나는 자리였다.


"띄어쓰기는 독서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바꾸면서, 독자들의 지적 능력을 바꾸어놓았다. 이는 지적 능력이 평범한 독자들도 더 빨리 읽고, 점차 더 어려운 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띄어쓰기 덕분에) 독자들은 단지 독서에 능숙해졌을 뿐 아니라, 집중력도 더 좋아졌다. 여기에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깊이 읽기'라고 부르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The Shallows)』-


미래학자가 던진 이 주장들은 문명의 진화사 속에서 ‘읽기’라는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기술의 진보와 긴밀히 맞물려 있었는지를 새삼 일깨운다. 그는 띄어쓰기라는 단순한 기술적 발명이 인간의 인식 구조를 바꾸었고, 그것이 더 깊고 조용한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독자들은 이제 단지 문장을 해독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장을 따라 사유의 구조를 형성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띄어쓰기는 단지 글의 장식이 아니다. 문서는 읽기의 도구이자, 문명을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정교한 장치다. 장치가 정밀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흔들리듯, 잘못된 언어의 운용은 사고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 효율을 명분으로 띄어쓰기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 논리는 언어를 단순한 정보의 통로로만 보는 시각에 머문다. 글쓰기에서 띄어쓰기, 문단의 분절, 문장부호의 사용은 모두 문자 바깥의 ‘의미의 여백’을 창조한다. 그 여백 속에서 독자는 호흡하고, 의미는 숨을 쉰다.


편집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대. 대학신문 제공


요즘 잡지나 미디어 지면에서 종종 ‘힙함’을 위해 문장을 시각적 오브제로 다루는 경우를 본다. 서술부의 부사구나 보어 뒤를 인위적으로 끊고 줄을 바꾸는 식이다. 보기에는 감각적이지만, 읽기의 맛은 사라진다. 문장이 하나의 음악이라면, 이 같은 편집은 리듬을 깨뜨린 불협화음이다. 문장을 시각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태도는 언어가 가진 생리학적, 문명사적 질서를 망각한 편집의 폭력이다.


문자와 문장은 그 자체로 사유의 구조를 반영한다. 따라서 문서를 함부로 해체하거나 편집하는 일은 단순한 형식의 조작이 아니라, 의미의 맥락을 변형하는 행위다. 그러한 인식 아래에서 ‘편집의 인문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해력과 집중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는 오늘, 출판과 미디어, 그리고 콘텐츠 플랫폼이 가장 먼저 성찰해야 할 과제일지도 모른다.


좋은 글은 ‘말하듯 읽히는 글’이라 믿는다. 띄어쓰기는 말하기의 호흡을 문장 안으로 옮겨오는 장치다. 띄어쓰기 없는 문장은 쉼표 없는 랩처럼, 끝내 어디에도 숨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소한 ‘틈’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가장 정교한 발명이다.


물론 띄어쓰기는 늘 난제이자 트라우마다. 손끝의 미세한 실수 하나가 문장의 의미를 바꿔놓기도 한다. 맞춤법 검사기에 의지해도 오류는 반복되고, 플랫폼마다 기준은 다르다. 이 반복은 일종의 ‘타임루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언어를 살아 있는 실험으로 만든다. 인간이 언어를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다듬어 가는 과정, 그 모순 속에서 문명은 자라난다.


인간은 퇴화되는가? AI Sora


AI는 인류로 하여금 전례 없는 규모의 정보 도서관에 접근하게 했다. 그러나 그 방대한 편리함의 대가로, 우리는 ‘깊이 아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AI는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신속히 제시하지만, 그것은 ‘앎의 체화’를 대신할 수 없다. 앎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생각의 체온을 동반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 지적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풍요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내면적 능력을 마비시켰다. 기억과 감정, 사유의 리듬이 기계의 정밀함 아래에서 점점 무력해지고 있다. 니컬러스 카가 지적했듯, 기계식 시계가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앗아갔듯, 기술은 우리로부터 생각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앗아가고 있다.


문장과 문단, 띄어쓰기와 부호는 단순한 문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한 마지막 구조물이다. 그 틈새에서 우리는 여전히 숨 쉬고, 생각하고, 느낀다. 띄어쓰기는 결국 인간의 사유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간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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