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가치는 모두 "변한다"는 것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는 살인 사건에 대한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껍데기로 쓰고 있다. 196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버클리 코브의 습지에서 일어난 남성 체이스 앤드류(해리스 디킨스)의 죽음에 대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습지 소녀"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슨)에 대한 재판 과정이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단 재판 과정의 묘사와 표현은 여느 드라마 보다 힘이 빠져 있다. 중간중간에 카야의 지난 이야기들이 끼어들며, 영화는 서스펜스를 놓아 버리고 어느새 펼쳐진 습지의 풍광과 함께 서정적 서사로 변주한다. 이런 지점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관점도 나뉜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는 '대서양의 공동묘지'로 불리는 지역이다. 잔잔한 수면에 속아 지나가는 배들을 난파시키는 거친 물속을 품은 곳이다. 습지는 늪과 다르게 다양한 생태계가 계속 순환한다. 어디가 육지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해안선을 그리기 어렵다. 뭍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내딛다가는 발목만큼 빠지기 십상이다. 미로처럼 얽힌 물길은 계속 흐르고 이어져 광활한 생태계를 이룬다.
늪과 못, 석호, 개펄, 바다가 이어지며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살아 내는 공간이다. 시절마다 오가는 철새와 조류들의 이동으로 주변의 모든 다양함을 품어 낸다. 이렇듯 습지는 "생"의 공간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죽음"을 딛고 서있다. 포식자와 먹잇감이 공존하고 어떤 죽음은 다른 뭣에게는 삶을 선사하게 된다. 그 삶과 죽음의 순간에 어느 가치도 선과 악을 나눌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죄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인간들에게도 이 공간은 똑같은 기회를 준다. 쓸모없어 보이는 이 습지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다.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 세상으로 부터 영원한 외지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이 생존해 내는 곳이다. 오로지 자연에 기대어 살아 내는 곳이다. 전쟁 후유증의 부적응자부터 범죄자까지 숨어들어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쉬는 곳이다. 5마일(8Km)만 나가도 미들에이지의 물질적 풍요가 만든 문명의 마을이 있지만, 그곳은 누구나 환영해 주지 않는다. 사회에 디딜 틈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쫓기듯 물러터진 습지의 땅 위에 허술한 판잣집을 짓고 살뿐이다.
이런 공간적 배경과 그것을 조망하는 영상 덕분에 어떤 이들은 성급하게 "환경"을 주제 삼아 이야기한다. 그럴만한 것이 원작의 작가가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한 환경 운동가이자 생태학자라 그 프로필과 습지에 대한 명세적인 묘사가 원작에 들어 있다. 그러나, 조금은 섣부른 단정이 아닌가 싶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애써 유추하지 않는 한 찾아 읽기 쉽지 않다. 영화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자연과 생태에 대한 사유를 요즘 유행하는 "환경"이랴는 슬로건에 묶어 버리는 것도 억지스럽게 생각된다. 사람들은 늘 "껍데기"만 보고 단정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잊은 채 말이다.
영화의 문법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의 살인 사건에 대한 진범을 찾는 일은 이내 포기하게 된다. 아니 굳이 하고 싶은 생각을 거두게 된다. 카야에겐 체이스를 죽일 동기와 수단은 분명히 있었다. 동네에서 희귀한 존재인 습지에 혼자 사는 카야를 누가 먼저 취할 것인가 내기하듯 다가선 체이스의 본심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습지를 잘 알고 체이스와 함께 간 적이 있는 화재 감시탑에서의 추락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배심원에게 받아들여진다. 남은 것은 기회가 되는 알리바이뿐인데, 이것에 대한 공방은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형식의 스토리텔링과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1960년 대의 하퍼 리의 베스트셀러 <앵무새 죽이기>가 떠오르게 된다. 1936년의 소녀 살인 사건에 피의자가 된 흑인에 대한 재판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레고리 팩이 변호사 애티커스 역으로 분해 아버지 세대에 잘 알려진 고전이다. 수사물과 법정 드라마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국 범죄 사건과 재판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구조가 흡사하다.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당시의 사회작 문제-흑백 갈등, 차별, 편견, 악의 평범성-들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시대에도 반향을 일으키는 이야기라는 점도 서로 조응한다.
이렇듯 이야기는 장르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다가 오지만, 결국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존재를 눈치채고 알아보는 것은 독자와 관객의 몫이 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살인 사건이 있지만 하드 보일드 스릴러가 아니고, 습지와 늪과 만, 자연의 생물학적 이야기가 풍성하지만 환경 운동 아니며, 애틋한 사랑이 있고 뜨거운 재회와 뭉클한 이별이 있지만 로맨스도 아니다. 영화이자 책이 되는 이야기는 처연한 생존 보고서이자 늘 변하지만 지나고 보면 변함없는 유일한 존재 자연에 대한 찬송이다.
껍데기 안에는 "삶"이 있다. 아니 적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그 껍데기를 보고 전부를 보았다 생각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껍데기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증명서에 한 칸을 차지한다고 삶을 함께 지고 가는 당연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영화 속의 카야의 가족들은 어떠한가. 전쟁 후유증으로 알코올 중독에 상습 폭력자가 된 아버지는 물론 그것을 참지 못하고 집, 즉 습지 밖으로 떠난 엄마와 언니, 오빠들. 그들이 떠난 껍데기 같은 습지의 오두막에도 생명을 유지하려는 소녀의 생존은 계속되고 있었다.
"집 밖은 다 위험한 곳"이라는 매일 취해있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습지 밖의 사람들은 그녀를 "습지 소녀"라 부르며 영원한 이방인 취급을 하였으니까. 1960년대 보수의 가치가 극도로 팽배한 미국 남동부의 다운타운이 자연이 보듬어 지키는 습지보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로지 그녀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사람들은 여전히 백인들에게 "Sir"이라고 존대하는 잡화점 흑인 부부 점핀과 그의 아내 마벨뿐이다. 그들도 오랜 미국대륙의 역사 속에 영원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행복은 고만 고만하고 불행은 나름이라는 톨스토이의 서설이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각자가 살아가는 속살은 껍데기를 들추어 보아야 보이기 마련이다. 영화는 이 껍데기를 들추듯 이야기에 기이한 전환을 심어 놓았다. 체이스를 죽인 것이 카야인지, 그를 지켜주고 싶었던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인지, 아니면 오래간만에 그녀를 찾은 군인 오빠 조디인지 가늠이 보는 추리 의지가 온 데 간데 사라진다. 마치 시적(詩的) 전환이랄까.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서정의 세계로 변주한다. 점점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하는 물음만 계속 맴돌게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에 나머지 가족들은 없는 척하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들이 안전하게 숨을 곳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정보 외에는 설명되거나 보여 주지 않는다. 진짜 그런 곳이 있는지, 있다면 진짜 가재들이 노래를 하는지, 노래를 한다면 어떤 소리를 낼지가 궁금해진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실로 알고만 싶어 진다. 범인이 누구인지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모두가 카야를 버렸다. 가족은 물론 지역사회도 버렸고, 그녀를 사랑했던 테이트도 자신의 장래를 위해 대학으로 떠난다. 잡화상 점핀마저 "백인들의 일에 깊숙이 엮이면 곤란해진다"는 인생 철칙이 작용한다. 사회 복지사는 그룹홈으로 버리려고 하고, 동네 녀석들은 외로운 그녀의 처지를 이용하고 요구를 채우려 할 뿐이었다. 그녀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습지"였고, 자연이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녀를 절대 버리지 않을 습지이고,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저 숲 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
습지는 죽음을 통달한 곳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삶도 통찰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죽음을 비극이라 규정짓지 않는다. 더더욱 죄가 되지 않는다. 그저 포식자에게 먹잇감이 되지 않는 방법은 그 포식자가 죽어 없어지는 섭리뿐이다. 그 포식의 활동에 저항하는 일은 죄가 아니다. 추락사한 청년의 사건은 인간 세계에서 엄청난 일이지만, 자연이 보기에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자연이자 생물학의 세계이다. 사마귀가 번식 활동 후 배양 기력을 위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일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카야는 그녀의 관찰일지를 통해 반딧불이도 마찬가지라 일러 준다. 짝짓기를 위해 두 마리를 유혹하는데 하나는 번식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식량으로 삼기 위함이라고. 생물학에는 윤리나 도덕이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한 생명은 다른 목숨을 희생시켜 직속되고 이아진다. 죄를 물을 일이 아니다.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다리를 다친 암여우는 새끼들을 버리고 간다. 자신도 지키지 못할 상태에서 새끼까지 챙길 수 없다. 모두 죽자는 것이 된다. 어미 여우는 새끼들을 포기하고 자신을 치료한 후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새끼를 낳고 기른다. 비정하다는 평가가 개입될 수 없는 곳이다. 어미가 다친 채로 새끼들을 지켜낼 수도 없을뿐더러, 자기 자신마저 종의 유지를 하지 못했을 테니까. 자연은 이렇게 변함없는 듯 변하며 시간을 이어 나간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야생의 투쟁과 생존의 세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복잡계의 딱 들어맞는 계산이다. 수학이자 과학의 세상이 냉혹한 생존의 모습으로 펼쳐진다. 단 한 가지, 자연은 서로의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공존한다. 나의 가치와 양태와 같지 않다고 고의 배척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다름이 그저 그대로 공존하도록 내버려 둔다. 특출 난 비범함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며, 티 나는 모자람을 억지 채우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본능적 욕구와 냉혹한 결단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나 함께 하기로 한 이상 절대 배신하지 않는 곳이다. 그저 경우의 수가 확률처럼 작동하지만, 한 가지 원칙에 대한 방향은 잃지 않는 곳이다. 바로 자연은 늘 변하는 곳이라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자연이 변한다는 진리뿐이다. 습지와 자연은 그 변화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이 있고, 부화와 도태가 있으며, 썰물과 밀물이 있는 곳이다.
인간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 작은 용량의 두개골로 "절대 불변"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꾸며 대고 산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허튼 믿음을 "신념"이라고 우기며 산다. 그 반과학적이고 몰지각적인 생각을 "인간적"이라고 억지 믿고 살아간다. 카야는 더 이상 습지의 소문 가득한 미지의 소녀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긴 소문으로 이어진 25년 간의 고착된 편견의 총합으로 볼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믿는 변호사 밀턴(데이빗 스트라탄)과 지인들만 그 변화를 인정할 뿐이다.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문명화되고 현대화됐다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에게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르는 영화이다. 지성의 비관주의로 살아가되 의지의 낙관주의를 잃지 말아야 함을 주인공 카야는 일생을 통해 웅변해 주고 있다. -오동진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중-
문명화되었다는 자만은 시스템을 맹신한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시스템이 완전 무결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느 소수자나 한 사람이 그 시스템을 바꾸려 한다는 생각이 들면 좀처럼 참기 힘들어진다. 마치 세상의 창조주 마냥 모든 현상을 사고와 사건이라 부르며 자신들만의 척도로 이리 재고 저리 재어 내칠 궁리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환경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사림들이 있다. 각자의 기준이라 그 다름을 인정한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것의 본질에는 자연과 그 안에 사는 인간은 각자의 삶이 있다. 세계와 사회, 집과 가정, 환경과 자연이라는 껍데기 안에는 "생명"이라는 속살이 살아 있다. 그 본질이 있을 때 환경이라는 담론이 성립된다. 탄소배출이니 RE100이니 하는 인간의 산수가 만들어 낸 기준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명화되고 지성화되었다고 착각하는 자의적 우월감이 감히 "자연"을 안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소설이나 영화를 읽고 본다면 굳이 찾아들지도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돌아갈 습지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만들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의적 비판자가 되지만 섭리의 작동이라는 희망의 낙관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필요한 때이다. 습지 밖의 세상은 여전히 위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