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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09. 2019

당신을 포기한 자리에 남은 것들


어제는 함께 있던 사람들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과 내 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이루어졌으면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투명한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을 손끝으로 닦던 사람이 그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 눈동자 너머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 눈동자가 당신 눈동자도 아닌데,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었습니다. 슬퍼서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당신을 생각하면 내 마음에 여울이 져서요. 그냥 그렇게 되어서요. 내 마음 안으로 별 내용 없는 여울이 일어나서요. 거기서 튄 물방울이 내 마음의 테두리를 적셔서요. 해일이 일어나 내 생활을 으깨 버리는 수준은 아니어도, 아직 당신 생각은 내 마음의 물결 흐름을 바꾸어서요. 


모르죠, 아직 사랑하는지도. 사랑의 형태를 내가 전부 헤아리고 있는 건 아니니까. 잊기 전까지는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도 사랑이겠죠. 이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고백의 문장에 들어갈 수는 없어도, 독백의 문장에 들어갈 수는 있는, 그런 사랑. 당신을 원하지 않고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당신 생에 구겨진 곳이 없기를 바랍니다. 구겨진 곳은 흔적 없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움 없이 사랑하는 법을 아나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좋습니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제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일은 내 마음 안으로 부드러운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그 바람이 나도 몰랐던 종류의 꽃을 흔들고, 나로 하여금 그 향기를 맡게 합니다. 세상에 없는 듯한 그 꽃의 색깔에 감탄하게 만듭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은 나에게 일종의 기쁨입니다.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기쁨입니다. 나는 두 번은 없을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오직 진심이어서, 나는 그 투명한 진심을 돌아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뿐입니다. 그 기쁨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기쁨을 디디고 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당신을 만날 거라는 기대 같은 것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신에 대한 내 마음과 나, 이 둘뿐입니다. 내 안에 당신 몫의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여나 당신이 서운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이미 당신은 나를 하얗게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뭐가 중요할까요.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의 남은 생을 잘 이어 나가는 것 말고는. 

잔여물처럼 남은 사랑을 보관하거나 소화하는 것은 일상의 변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에게 오늘 가장 소중한 건 당신이 아니니까. 그 점이 더는 낯설거나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런 덤덤한 내 마음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당신에게서 돌아섰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당신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단념을 마주하는 일이 처음부터 평안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그 아쉬움은 무참할 정도이기도 했습니다. 몸 안쪽 어딘가가 끝도 없이 욱신거리는데, 그게 육체의 병이 아님을 알아서 오래 난처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낮에도 반쯤 감은 눈을 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일상의 체계를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한없이 더디게 멀어졌습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잘 될 거라는 확신이 너무 커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당신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모셨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당신과의 모든 것을, 나는 아주 더디게 포기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구 반대편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를 뽑는 것이 손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그 포기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포기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나는 보았습니다. 그 포기가 내 앞으로 남긴 것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과 내 관계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당신과 내 관계뿐이라는 사실을.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 내가 나 스스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루어 왔는지를. 관계가 반쪽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반쪽일 수가 없는 것이어서, 사랑하는 동안에 사람은 엄청난 위력으로 엄청난 것들을 이룩하며 살아간다는 근사한 진리를. 나 아닌 누군가를 내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모시는 일이 나의 인내심을 얼마나 시험하였는지를. 그렇게 빈약한 내 인내심을 얼마나 키웠는지를. 나의 인색함을 얼마나 물리쳤는지를. 사랑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수록 사랑에 대한 성찰의 폭이 더 넓어지니, 사람은 무슨 수를 쓰든 사랑 때문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멋진 교훈을. 나는 보았습니다. 보고 나서 안도하였습니다. 당신과 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이 길로 잘못 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늘 있었는데. 그 생각이 확신으로 돌변해서요. 당신을 사랑해서 많은 날 행복했는데.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로는 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위안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내가 나 혼자 이룬 것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일. 그런데 그렇게라도 위안이 된다면, 그 자기 위안, 좀 해도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밑 빠진 독에 절망을 들이붓는 일보다는, 자기 위안이라도 가지고 새로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는 것이 더 나은 일 아닐까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그게 자기 위안이든, 새로운 각성이든, 뭐든, 그것을 안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을 모시려고 마련해 두었던 내 곁 하나를 뒤로하고, 새로운 곁을 만들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뒤에 있는 길과 내 앞에 있는 길이 동등하게 예뻐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마음 한가운데 서 있는 고목 같던 당신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실바람처럼 불어와 내 마음을 한 번씩 흔든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좋은 사람입니다. 나에게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나날이 웃음으로 시작되고 끝나기를 바랍니다. 당신으로 인해 내가 환희로웠던 만큼 당신의 일상에 즐거운 일이 덤으로 얹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남은 생의 모든 날들을 즐겁게 보낼 수도 있을 텐데. 그만큼 나는 당신이 내 생에 들어와 참 환한 날들을 살았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진 세계에서 모든 걸 또렷하게 보며, 어둠 한 점을 밟지 않고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당신이 내 생의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가 주어서.


당신으로 인해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성사 여부, 관계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각자의 마음이라는 것을. 사람은 본심을 꺼내 쓰는 만큼 그 영혼의 키가 자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제나 관계의 껍데기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 껍데기를 만드는 게 관계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항상 그 껍데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과는 그 껍데기를 조금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관계 안에 담긴 마음을 보는 안목을 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문을 두들겨 보았습니다. 내 본심의 자리로 들어가는 문을. 그러니 어떻게 실패이겠습니까, 당신과 내가. 당신은 나를 모르고 살아도, 나에게 나와 당신은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위대한 발견이며, 오로지 당신 덕분으로 이루어 낸 성취입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산다 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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