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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 Mar 30. 2022

오늘도 당신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선량한 차별주의자 _ 김지혜ㅣ 월간 다다르다 아멜리에 편 

© 2022. PARK EUNYOUNG. All right reserved


우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장애인 활동보조

2009년 어느 날, 시청과 광화문 사이 한 빌딩 앞에 서 있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활동보조에 관한 예산 확보'를 위한 시위 현장이었다. 장애인 야학에서 활동보조 자원활동을 하고 있던 터였다.


자원 활동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로 일대는 아지트 중 한 곳이었다. 하이퍼텍 나다, 제로원디자인센터, 동숭교회, 이음 책방, 풀무질, 소극장, 낙산공원. 애정 하는 공간이 그득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자연스레 동숭동으로 향했다. 기사를 작성하거나 디자인 편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관심 있는 영화가 개봉하거나 날씨가 좋은 날이면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동네에 머물렀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늦은 시간 집으로 향하는 날이 잦아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지하철을 탔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호선 막차 시간에 맞춰 혜화역으로 향했다. 자정을 한 시간 남짓 앞둔 시간. 플랫폼은 바람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면, 어디쯤에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늦은 시간에는 유난히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많았다. 플랫폼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자주 마주쳤고, 그들의 얼굴이 익숙해졌다. 반복해서 마주하기를 몇 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이 늦은 시간에 전동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많을까?'


다음날부터 바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터였다. 작심하고 동숭동 일대를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마로니에 뒤편에 있는 한 건물을 발견했다. '노들 장애인 야학' 이란 작은 명판이 붙어있었다. 곧장 건물로 올라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노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활동가분들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봤다. 최대한 눈을 똘망하게 뜨고 이곳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심히 내비쳤다. 의아함은 미소로 바뀌고, 활동가분들은 흔쾌히 나를 맞아주셨다.


몇 주에 걸쳐 야학에서 지정한 필독 도서를 읽으며 장애와 중증 장애인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노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대다수 중증 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이란 올바른 명칭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 '혐오' 등의 문제를 차근히 학습했다. 중증 장애인을 보조하는 활동이었기에, 활동가분들의 경험에도 귀 기울였다. 그렇게 보조교사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노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낮에 일했고 전동휠체어를 탔다. 연극, 무용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퇴근 후, 노들까지 와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수업을 들었다. 내 역할은 옆에서 친구들을 보조하는 일이었다. 수업 시간에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거나 친구들 옆에서 공부할 때 필요로 하는 일을 보조했다.


수업 시간 활동보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친구들이 많아서였다. 중증 장애인이 혼자 화장실을 이용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특히, 여성 중증 장애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팔근육이 약해 안전대가 있어도 휠체어에서 변기로 혼자 이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몸을 이동하면서 한 손으로 옷매무새를 고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쉬는 시간이 되면, 화장실 이용을 힘들어하는 친구들의 상체를 온전히 들어서 이동할 수 있게 보조했다. 혼자 하기가 버거워 활동가 선생님과 둘이 달려들어 보조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활동보조 없이 생활하는 친구들의 일상이 스쳤다. 비장애인인 내가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낮에는 사회 활동을 하며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만나며 '장애인의 자립과 탈시설', '장애인 이동권', '중증 장애인 활동보조 예산'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서는 지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꼬집어 말한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정말 평등한가? 나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그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할 때다. (p.38)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p.133)
화장실은 그 사회의 평등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꽤 훌륭한 척도다. 온갖 개인적 특징이나 재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화장실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적어도 하루에 몇 번씩 가야만 하는 공간이 어떻게 설계되고 분배되어 있는지를 보면 사회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으며 누가 주류이고 누가 배제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p.172-173)




삶의 방향과 도시여행자

야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자유, 평등, 정의'라는 가치를 배우기 위해 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학문과 현실은 괴리감이 컸다. 때때로 법은 부당했다. 세상은 여전히 차별과 혐오가 만연했다. 사회적 약자가 ‘투쟁'을 외치지 않아도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간 나의 무관심과 무지를 부끄럽게 여겼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이면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졌다.  


라가찌를 만난 건 이쯤이었다. 우리는 광동제약에서 운영하던 대외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대학생을 선발해 여행을 보내주는 '비타 500 테마여행단'. 2009년 8월에는 해외여행을 탐방할 15기를 모집하고 있었다. 4박 5일 동안 중국에 가서 고구려 문화를 탐방하고 백두산을 오르는 일정이었다. 1차 서류 면접과 2차 대면 면접으로 30명의 대학생을 선발했다. 그중, 두 명이 나와 라가찌였다. 사실 우리는 두 번의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 여행에 참여하는 일정 중반까지도 딱히 친하지 않았다. 라가찌가 영화제와 독립영화에 참여해 영화를 만들거나 스태프로 활동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찾아와, 버스에서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돼서야 라가찌에게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가찌는 내게 형이 정신지체 장애가 있었고, 몇 해 전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장애인 야학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터라 라가찌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놀랐다. 그날 밤, 라가찌와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친해질 수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가을의 문턱에 노들 문화제에 친구들을 잔뜩 초대했다. 라가찌도 와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장터유람기'와 '축구 음악공연: For citizen' 등을 함께 기획하며 '도시여행자'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도시여행자 세계관 중 하나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기업'이다. 공간을 운영할 때, 크고 작은 기획을 진행할 때, SNS로 이야기를 전할 때, 소모임을 운영할 때, 누군가와 함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때로는 부당하다. 부당한 법은 비민주적인 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p.164)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p.189)
기업이 인종, 민족, 성별, 장애, 종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출신 국가 등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하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다양성 경영이 기업의 이윤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기업이 다양성 경영을 채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 책무로서 인권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기업은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윤리적 책임을 가진 주체로 이해된다. (p.203)




질문하고 사유하는 페스티벌 '시티페스타'와 배리어 프리

도시여행자가 2015년부터 기획하고 있는 질문하고 사유하는 페스티벌 '시티페스타'. 그가 시티페스타가 던진 '삶은 여행, 아름다운 공존, 로맨틱 대전', 느슨한 연결'이라는 주제이자 질문은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의제였다.


2016년부터 시티페스타를 통해 도시여행자의 장소성을 벗어난 기획에 도전했다. 축제를 기획하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 중 하나가 ‘이동권 약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페스티벌'이었다. 옛 충남도청은 대전 원도심에서 유일하게 베리어 프리 공연과 전시가 가능한 장소였다. 사람들이 유아차나 휠체어를 끌고 와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장애인 화장실도 있었다.


시티페스타를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도 중요했고, 옛 충남도청이라는 대전 역사와 함께한 건물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티스트의 성별 균형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일, 세대를 아우르는 라인업, 시민 모두가 관람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페스티벌을 설계하는 일도 중요했다.


앞으로도 시티페스타는 조금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야기할 것이다.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p.137)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어떤 사적 특성이 공공의 장소에서 받아들여지는가? 공공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공공 공간에 입장할 자격은 누가 정하고 통제하는가? (p.141)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은폐된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누렸던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p.151)




라이프스타일 서점 '다다르다'가 지향하는 삶의 다양성

2018년 8월 26일. 도시여행자의 시즌 1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대흥동 공간에서 갑작스레 쫓겨나게 되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새로운 공간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서점 브랜드를 새롭게 선보이자고 했다. 서점 '다다르다(differ and Reach)'의 시작이었다. 내부 공모를 통해 라가찌가 제안한 '다다르다(differeach)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다다르다에 담긴 의미를 디자인으로 전달하기 위해 7월에 한 달간 이사를 준비하며 틈틈이 디자인했다.


다다르다라는 이름에 다르다(differ)'와 도달하다(Reach)'의 이중적 의미를 담았다. 한글 로고에는 다다르다가 지향하는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조형적으로 담았다. 영문 로고에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 연결과 확장의 철학을 담았다. '우리는 다 다르고,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어요. We are all different, so we can reach each other.'를 서점의 모토로 정했다.


다만, 공간에 대한 개선은 숙제로 남아있다. '도시여행자' 공간을 마련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우리 건물이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을 초대하기에 미안한 곳이었다. 같은 건물 1층을 얻었을 때 한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화장실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한편이 구겨져있었다. 서울에서 나를 보러 와 준 친구는 결국 전동휠체어를 타지 않고 기차를 타고 대전에 왔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칼칼했던 그날의 마음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지금의 다다르다 건물을 계약한다고 했을 때도 반대했다. 신축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계단이 있어 휠체어로는 2층에 올라올 수 없었다. 1층 화장실은 한 사람이 들어가기도 어려운 구조였다. 갑작스레 대흥동 건물에서 쫓겨났고, 원도심에서 우리 예산으로 얻을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파트너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 공간 임차를 미룰 수도 없었고, 우리는 결국 이 공간을 계약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공간 디자인을 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마음 한편의 아쉬움을 지울 순 없었다. 결국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동 약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점을 건축할 수 있을 만큼.




인정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 집단에 대한 배제를 지속시킨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아이르스 매리언 영이 말하는 ‘차이의 정치’는 이렇게 ‘중립성’으로 은폐된 배제와 억압의 기제에 도전하기 위해 ‘차이'를 강조한다. (p.174)
우리는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세상에 차별이 있는 한 차이는 실재하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p.185)




누군가를 호명할 수 있는 권력.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내 삶에 '권력'이란 단어는 생경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무슨 권력인가 싶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주어진 권력은 꽤나 컸다. 대학시절부터 여러 분야에서 에디터로 활동했다.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기쁨이 컸기에 주로 인터뷰 기사를 썼다. 내게는 누군가의 삶을 인터뷰하고, 나의 언어로 지면에 내보내는 권력이 있었다. 도시여행자를 창업하고도 다양한 권력을 얻었다. 해마다 도시・문화예술・로컬・청년과 관련한 강연이나 분야별 정책 자문을 통해 의견을 피력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요청이 들어오면 마다했던 일도 있었다. 이제는 그리하지 않는다. 나의 권력을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데 활요하기로 마음먹었다. 약속의 실천이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친구들과 이웃들의 삶을 떠올린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 행위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p.27)
누군가를 무엇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p.95-96)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하나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체 사이의 권력관계가 그 말의 의미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p.142)




2022년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차별과 혐오

오늘도 나의 친구들은 거리로 나간다. 2022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장애인들은 활동보조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움직이지 못해 불에 타서 생을 마감하고,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해 리프트에서 휠체어가 떨어져 삶을 마감한다. 성소수자들은 거리로 나오는 자유마저 박탈당한다. 이주 노동자는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난민은 배제당한다.


누군가는 시위 때문에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사람들을 폄훼한다. 사람들을 '후천적 장애가 선천적 장애보다 비율이 높다'는 의견 따위로 설득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불의의 사고로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건 당연한 인간의 권리라 말하고 싶다.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p.139)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은폐된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누렸던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p.151)
격렬한 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한 역사와 별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의 집회와 시위를 공공질서에 해로운 행위라고 본다. (p.156)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공공질서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는 이 한마디는 상황에 따라 때로 강력한 효과를 가진다. 극단적으로는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자의 모든 권리를 부정하고 활동을 억압하는 손쉬운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공공질서'라고 할 때의 ‘공공'이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다수가 동의하는 질서가 공공질서이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소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만능 논리가 탄생한다. (p.157)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p.187)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는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p.204)




오늘도 당신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그간 소수자를 위해 혹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차별과 착각도 목도했다. 이 질문은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때의 나처럼 혹은 지금의 나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월간 다다르다의 첫 번째 책을 『선량한 차별주의자』 로 선택한 이유다. 앞으로 다다르다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모두가 읽기를 바라며 골랐다. 차별과 평등에 관한 좋은 책은 많다. 세밀하고 포근하며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다가가는 책은 드물다.


자신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능력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자신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이 읽으면 좋겠다. 행정가들이 읽으면 좋겠다. 종교인들이 읽으면 좋겠다. 인권 활동가들이 읽으면 좋겠다. 교육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글을 쓰는 읽었으면 좋겠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가 읽으면 좋겠다.


이 책이 밀리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되면 좋겠다.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p.110-111)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그러니 세상이 공정하다고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비난의 화살은 부정의를 외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에게 뭔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은  자주 있다. 왕따나 괴롭힘,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  수많은 사건들에서 우리는 종종 피해자를 먼저 의심한다.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별의 부당함을 보기보다 차별의 부당함을 외치는 소수자의 흠을 찾고 비난한다. 그렇게 차별은 계속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소수자를 위해 혹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착각으로 차별을 견고하게 만들  있다. (p.169)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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