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ner Ring by C.S. Lewis
March 4, 2018
박진호
‘내부 패거리’는 1944년 12월 14일에 런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에서 루이스가 행한 기념강연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한부분을 인용하며 톨스토이의 표현으로 '제2의 체계' 또는 '불문 체계'라고 일컫는 단체 안의 또 하나의 단체를 소개한다. 루이스식 표현으로 ‘내부패거리, The Inner Ring’ 이라 불리는 공식적이지 않고, 꼭 집어 소개할 수도 없는 방식의 모임,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은폐된 모임을 말한다. 우린 어디서나 이 '내부 패거리'를 만난다. 특징적으로 그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우리' 라고 부르며,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을 ‘그놈들', '그 일당', 또는 '그 패거리'라 부른다.
이 패거리가 생기는 큰 원인으로 우리에게는 이런 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구가 있고, 또 끼지 못해 바깥에 남겨지는 큰 두려움이 있다. 이런 욕구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속물근성이다. [snobbbery, 내가 더 잘났어~]. 빅토리아 시기의 '사교계'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남들처럼 해야한다, 남들보다 잘 해야한다, Peer Pressure ?]
이런 압박을 극복한다고 해도 우린 또 다른 욕구를 맞이 해야 한다. 속물근성에서 자신들을 지켜 내기 위한 또 다른 강력한 욕구가 그것이다. "이 가엾은 사람이' 원하는 것은 크고 화려한 사교장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단지 은밀하고 작은 다락방이나 작업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그들만의 공감대를 '달콤하게 인식하는' 그런 식의 욕구이며, 이는 너무나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내부패거리의 존재 자체는 결코 악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조직의 공식적인 체계가 언제나 이상적이지 않고 그렇게 운영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불문 체계가 생겨나는 것은 필요악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필요'이다. 그러나 우리를 패거리로 이끄는 욕구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 필요성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바라는 마음은 위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산은 달콤하네. 더욱 달콤한 것은
어떤 노파의 죽음.
어쩔수 없이 내부 패거리는 불가피한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거기에 속하고 싶은 갈망, 제외되었을 때 느끼는 괴로움, 또 선택 되었을 때의 기쁨은 어떻게 설명할까? 여기서 루이스의 삶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조언이 시작된다. 우리가 정말 선택된 소수, 내부패거리가 되고 싶은 이유는 거기에서 오는 이득, 권력, 돈, 불법을 저지를 수 있는 자유, 일상 의무의 회피, 징벌의 모면등을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밀하고 달콤한 친밀감 [the delicious sense of secret intimacy]'이다. 이것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앞의 모든 것에도 만족하지 못할것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때 내가 속한 일진회의 친구가 선도부라 복장검사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분명 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의 때문에 친밀함을 소중히 여겨 패거리에 들어가기 보다는, 편의가 친밀함 내부 패거리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떡보다 떡고물!]
바로 이 욕구가 우리의 행동의 크고 지속적인 주요 동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제어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린 이 유혹에 점점 더 깊게 들어갈 것이다.
내부 패거리주의자들의 문제를 두 가지 지적해 보자.
I. 누구나 내부 패거리가 될 선택의 순간은 예측하지 못하게 다가온다. 화려한 '총천연색'이 아니다. '우리'라는 말의 달콤함에서 규칙에서 멀어지는 일이 더없이 유쾌하고 다정한 분위기에서 빈번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파산이나 감옥살이로 끝이 나거나 혹은 부자가 되어 사회에 기부를 하는 모습으로 남을 수 있을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이미 그들은 악당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부 패거리에 대한 열정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을 그 어떤 열정보다 능숙하게 조정해 아주 나쁜 일들을 하게 한다.
II. 이 욕망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원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왜곡된 욕망이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가령 음악을 좋아해 합창단에 들어 갔는데 연주 대신 단원들 간의 뒷감화만을 원한다면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냥 '안에' 들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은 다른 패거리를 찾게 되고 그런 반복은 결국 앞에 무지개를 쫒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부 패거리는 다른 사람을 제외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외부자가 없다면 끼리끼리의 내부 패거리들의 재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부 패거리에 속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극복한 후, 자신에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한 결과는 놀랍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요하고 꼭 필요한 집단내부에 들어 있을 것이다. 같은 훌륭한 기술자들이 가득한. 그 무리의 중심에서는 은밀하고 달콤함 대신 아늑함과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외부의 모습은 여느 패거리와 다를 바 없으나 자연스러운 모임의 비밀스러움은 '우연'적인 것이며, 배타성은 '부산물'일뿐이다. 모임의 누구도 산택된 소수가 되고자 이끌려 오지 않았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일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정'이라 부른다. 내부 패거리는 이 우정을 절대 나눌 수 없다.
내부패거리에 대한 글은 여기서 끝나지만 루이스의 '네가지 사랑'중 '우정'편에서 나오는 내용이 많이 연관이 되어 추려서 붙혀 본다.
"참된 우정은 사랑중에서 가장 질투가 적은 사람입니다. 두 친구는 친구가 늘어나 셋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셋은 넷이 되는 것을 즐거워 합니다. .. 워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고독, 그들과 군중 사이에 쳐진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고독이나 장벽이 줄어든다면 그들은 기뻐 할 것입니다. … 이런 점에서 우정은 영광스럽게도 천국 자체에 대해 유사성으로서의 가까움을 보입니다. "
"당신이 나를 사랑합니까 라는 말은 당신도 같은 진리를 보고 있습니까? 혹은 적어도 당신도 이 진리에 관심이 있습니까? 라는 의미입니다. .. 연인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지만, 친구는 나란히 있는, 함꼐 앞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 '단지 친구를 위할 뿐인' 감성적인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