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꼬리 vs. 뱀 대가리 전략

인생의 결정에 관하여

by 박정훈

최근 학부 전략경영 (strategic management) 강의 중, 학생들과 우리 학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학교는 LA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그리고 최근 학부 경영전략 강의 중 학생들과 우리 학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학교는 LA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그리고 예수회 (Jesuit) 대학의 교육 철학을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최상위권 학교 (top-tier school)"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약 6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 중 우리 학교를 "목표 학교 (target school)"로 여긴 학생들은 20%도 안 됐다. 대부분은 고등학교 시절 UCLA를 비롯한 UC 계열 학교들 USC 등을 목표로 했다고 했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1922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qy%2Fl371UV6uACTeu3X6nw5mXTbg%3D 현재 일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 풍경.


고등학생 때 우리 대학을 목표로 설정했던 몇몇 학생들에게 왜 우리 대학을 선택했는지 물어봤더니 돌아온 대답은 "I wanted to be a big fish in a small pond rather than a small fish in a big pond (큰 연못에서 노는 작은 물고기가 되는 것보다는 작은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가 되는 것을 원했다)"였다. 이 대화를 통해 문득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들은 어땠는지 반추해보게 되었다. 최근에 교수로 임용된 후 한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교수라고 소개하면 내가 SKY 학부 출신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있어 흥미롭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 부분하고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지금까지 내가 내린 중요한 결정들의 공통분모는 "뱀 대가리" 전략이었다.


중학교 → 고등학교: 2008년도 수능 등급제 도입에 대비해 경기도의 한 도시에 위치한 일반 공립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해당 도시는 이미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과거에 학업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던 일부 공립학교에는 중학교 시절 학업에 열심히 임했던 학생들이 많이 진학했다. 그러나 굳이 그런 학교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능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해 내신 성적을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학업 수준에 대한 평판이 높지 않은 공립학교를 선택하여 내신 관리에 신경 쓰기로 했다. 당시 문과를 선택했는데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 기준으로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 대학교 학부 과정: 3년 동안 모의고사 성적이 전반적으로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에 국내 중상위권 대학에 100% 수시 전형으로 하향 지원했고 결국 합격했다 (참고로 내 모교는 충분히 좋은 학교이다. 게다가 대통령과 영부인을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그 결과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음에도 정시로 지원할 기회는 없었다. 다행히도 모교에서 4년 전액 우등 장학금 (a merit-based full scholarship)을 받아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


대학교 학부 과정 → 석사 과정: 다른 학교는 고려하지 않고 모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해외 취업은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고 국내 기업이나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지속 가능한 선택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석사 과정을 기반으로 박사 과정에 진학해 전문가로 인정받는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석사 과정 동안 연구자 교수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교수라는 진로도 염두에 두었지만 꼭 교수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석사 과정 → 박사 과정: 영어 기초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먼저 성문종합영어를 훑어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영어로 이력서 (CV, Curriculum Vitae)를 난생 처음 작성했고, 동시에 학업계획서 (SOP, Statement of Purpose)와 TOEFL, GRE 같은 필수 시험도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유학 지원 과정은 무척 힘든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런 와중에 구글 검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뉴욕 맨해튼의 한 대형 공립대학교 (public university)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뱀 대가리" 전략이 아니라, 단순히 미국 박사과정 진학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선택이었다. 당시에는 미국 최상위권 박사과정에 진학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어디든 입학 제의 (admissions offer)만 받아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어찌 보면 우연처럼 진학한 박사과정에서, 돌아가신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물심양면 도움 덕분에 끝이 보이지 않던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졸업생 대표로서 연설 (valedictorian speech)까지 하며 졸업할 수 있었다.


박사 과정 → 교수임용: 박사 과정생 시절 학계 취업시장에 나왔을 때 연구중심대학(R1)의 취업 제의를 거절하고 연구와 강의의 균형을 중시하는 대학 (R2)의 취업 제의 (job offer)를 받아들였다. 연구하는 것에 나름 열정이 있고 그걸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신고용 (tenure)을 위해 최상위권 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게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교수가 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교수로서 어떤 성과를 낼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들은 어찌 됐든 내가 스스로 선택해왔다. 물론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조언을 들은 적도 많았지만 결국엔 내가 생각한 대로 혹은 마음 가는 대로 결정을 내렸다. 흥미롭게도 내 결정을 되짚어보면 공통적으로 "뱀 대가리" 전략을 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SKY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욕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욕구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런 곳에 진학하지 않아도 인생 전체에 큰 지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사 과정 진학 때도 SKY나 카이스트를 고려할 수 있었겠지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익숙한 모교의 환경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박사 과정 진학 시에는 유학 준비가 부족해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고... 교수 취업시장에서도 다시 "뱀 대가리" 전략을 채택해 실행에 옮겼다. 돌이켜보니 부모님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랐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분들의 조언은 주로 "용 꼬리"나 "용 대가리"와 같은 선택을 권하는 쪽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냥 내가 판단하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나 보다.


미국에서 5년간 유학하고 교수로서 1년 넘게 활동하면서 만난 학술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최상위권 박사 과정에만 지원해 학위를 취득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용 꼬리"가 아니라 "용 대가리" 전략을 택한 듯 보였다.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곳에서도 성공할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한 자신감과 그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역량이 부러웠던 적도 있다. 학계 밖에서 만난 분들 중에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성공한 많은 분들을 보며 "큰 물"에서 활동하며 "최고"가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가끔 상상해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들에 전혀 후회는 없다. 하지만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왜 나는 그런 일련의 결정들을 내렸을까? 최상위권 학교에는 머리도 좋고 상상 이상으로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곳에서 경쟁하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최상위권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자신이 없어서 연구 압박이 덜한 학교를 첫 직장으로 선택한 것일까? 원래 경쟁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 걸까? (실제로 경쟁하는 걸 좋아하지 않긴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내린 결정들과 그 결과물들이 현재 내 사고방식과 사고 수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진다. 혹시 무의식적으로 "최상위권 대학은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목표 수준을 지나치게 낮춘 것은 아닐까?



"뱀 대가리" 전략을 선택했다고 해서 단 한 번도 내 개인적인 꿈이나 내 인생에 대한 열망의 크기가 작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단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means to an end)을 다르게 선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학생들과 우리 대학에 대한 인식에 관해 나눈 대화를 아래와 같이 마무리했다.


"너희들 모두 나보다 훨씬 머리도 좋고 똑똑하며 마음가짐도 성숙한 편이다. 이제 어차피 우리 학교에 오기로 결정했고 여기서 이미 3년 이상을 보냈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대학도 충분히 좋은 학교이고 다양한 기회들이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기회들을 발굴하고 이를 실제 성과로 이어가는 건 너희들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다들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적고 보니 아직 "뱀 대가리"가 된 적도 없으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조금 웃기다. "뱀 대가리" 전략을 택하는 것과 실제로 그만한 수준의 성과를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최소한 "뱀 몸통"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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