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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늘 Aug 08. 2021

크래프톤 웨이

이기문, 김영사, 2021

최근 본 중 가장 스트레스 받으면서 읽은 책이다. 

구멍가게지만 창업을 하고 보니,  

근거와 노력이 충분해도 잘되기보다는 안 되기가 훨씬 쉽다. 

돈과 인력,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시장의 욕구는 예측불허하고 까다로우며, 

조금이라도 잘 될 때는 모두가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으려 들고, 

안 될 때는 모두가 모두를 향해 실패의 원인을 돌린다. 

이 오랜 지옥 끝에 맛보는 성공의 단비는 너무나 짧고 

이후에는 깊은 공허가 남는다. 

이 공허 끝에 다시 자잘한 실패의 시간이 찾아온다. 


<크래프톤 웨이: 배틀그라운드 신화를 만든 10년의 도전>은 

'크래프톤이 직접 밝힌 크래프톤 방식의 비밀'이라는 카피를 달고 있지만 

실은 크래프톤 방식이 실패를 거듭하다가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맛보며 깨달은 것들을 다루고 있다. 

내가 게임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테라'가 업계 내에서 갖는 위상을 알지 못하지만, 

'게임 제작의 명가'라는 기치를 달고 위풍당당하게 개발해낸 '테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장 반응을 얻는 것에서 책이 시작한다. 


기껏 제작자들이 밤낮 없이 만든 게임으로 돈 벌어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해대는 업계 사업 방식에 반기를 들고, 

제작자들이 제대로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제작환경을 만들겠다는 기치로 사업을 시작한 블루홀 스튜디오는 

3년에 300억, 온 타임 온 버짓 맥시멈 퀄리티 프로덕션이라는 제작 목표, 

전에 보지 못한 정교하고 화려한 그래픽과 아이템 물량, 논타기팅 전투라는 기획 목표를 가지고 

위풍 당당하게 게임 출시에 돌입한다. 

그러나 3년 300억은 4년 400억으로 늘어지고, 

출시할 당시부터 리텐션(유지)이 빈약하리라는 불안한 예감을 안고 게임을 선보인다. 


엄청난 시장 기대와 함께 출시한 이후 곧장 하락세를 걷는 테라. 

어떤 기치를 내걸고 시장에 상품을 내놓더라도, 

소비자의 평가는 냉정하고 엄격할 수밖에 없다. 


"출시하기만 하면 성공이 찾아올 줄 알았다. 달콤한 미래가 씁쓸한 현실로 변해버렸다. 이대로라면 불루홀은 계속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출시 효과에 기대어 매출은 제법 오르고 있지만 당장 올해 예정된 미국과 일본 시장 출시 준비에 비상등이 켜졌다. 리텐션(유지)이 약하다고 증명된 게임이 해외에서 통할 수 있을까. 성공은 언감생심, 제작비용을 회수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_178쪽


창업하던 해 워크숍에서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에만 함몰되었을 때 기업답지 못합니다. 이윤 창출보다 중요한 것은 비전이나 꿈, 도전과 같은 가치를 확립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잘나가는 기업은 비전과 핵심에 대해 집착에 가깝도록 집중합니다"(_63쪽)라고 당당하게 발표하던 장병규 의장의 비전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이 같은 처절한 모습은 이후 테라의 미소녀 캐릭터 엘린이 인기를 끌자 엘린의 아이템 장사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극에 달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엄청난 괴로움을 느꼈다. 책을 만들다 보면 수시로 느끼는 가치 판단의 문제 즉 '내가 책 한 권 팔아먹으려고 이런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생각했던 과거 몇몇 장면을 떠오르게 했기 떄문이다. 


"반면 미국 엔매스에서 활약했던 현지 베테랑 게임 스토리 작가는 '어린 소녀 캐릭터인 엘린에게 선정적인 의상을 입히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그는 '아무리 부분 유료제를 적용한다 해도 어린 소녀에게 그딴 옷을 입히다니, 블루홀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테라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며 북미 현지화 작업에서 퀘스트와 스토리 창작을 도맡던 핵심 인재였다.'

장병규는 '블루홀은 엘린 의상을 팔 수밖에 없다. 뭐라도 팔지 않으면 회사가 없어진다'며 그를 달랬지만, 작가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장병규는 '블루홀이 돈을 못 버니 저렇게 훌륭한 인재가 떠난다'며 안타까워했다."

힝. 진짜 이게 뭐냐.

이후 332쪽에 '김창한의 제안서'라는 소제목이 나오기 전까지, 책은 돈줄 막히고, 사람 내보내고, 남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이야기로 점철된다. 서로 철저하게 영역을 분리하기로 했던 경영진이 제작진에게 일정 압박과 퀄리티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고, 리더십은 조직원들의 나태함을 비난하고, 조직원들은 리더십의 무능력을 비난한다. 

핀란드의 게임업체는 프로젝트가 엎어질 때마다 한데 모여 성대한 축하 연회를 연다는데(포스트모르템, 한 번의 성공에는 아홉 번의 실패가 필연적이므로), 블루홀은 실패할 때마다 엄청난 인간다툼과 자금 압박을 경험한다. '게임 제작의 명가'라는 기치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김창한이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배틀로얄 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은 스팀 게임을 구상한다. 장병규 의장에 미팅을 요청하고 잘 정리된 기획안을 보여준다. 김창한은 17년간 만든 게임 3종이 모두 실패했음을 고백하며, 그 세 게임 중 그나마 가장 잘 된 게임이 유행을 따르지 않고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 게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시장에 맞춰 유행을 따른 게임을 만들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하고 싶은 장르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는다.  

무려 500쪽에 이르러서야, 배틀그라운드가 해외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얻기 시작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때까지는 실패하고 비난하고 지치고 짤리고 제 발로 나가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책이 베스트 순위에 오르고 난 다음에 상장 소식이 들려 여러모로 사람 지치게 하는 책이 되었는데, 

김창한 대표의 일하는 방식에 만큼은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솔직하게 공유하고 구체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필요하다면 아무리 번거로운 일도 진행하며(배틀로얄 게임 원작사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섭외하면 팀을 꾸리도록 해주겠다는 말에 진짜로 그를 영입해온다) 성과가 날 때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말하자면 청량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일하고 싶다. ㅜㅜ


읽는데 너무 지쳐서 섣불리 권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물음이 생겼고, 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정신 바짝 차리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읽으라고 말은 못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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