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평생교육원 같은 대학엘 입학해야 하는데 등록금이 50만원정도 모자란다며 장학금이나 학자금 융자하는 방법이 없겠냐며 남자 분이 찾아 오셨다.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도 아니고 차상위도 아닌 ..
또 다른 부류의 국가혜택을 받는 분이라고 했다.
(나는 파견인원이라 업무가 다름.)
워낙 사연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나는 '왜?'라는 질문을 속으로라도 하지 않는다.
옆의 짝꿍 주사님도 본인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방법을 찾아보지만
평생교육원은 인가된 대학교가 아니기에 대출자체가 안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아저씨는 150만원까지는 어떻게 구해놨는데
50만원은 자신의 능력밖이라며 발을 동동구른다.
결국은 공무원들의 이웃돕기 성금 10만원 지원으로 마무리는 하였으나 주사님과 나는 뒷맛이 영 좋지 않았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부모가 능력이 되지 않아
해 줄 수 없을 때의 그 초라함과 미안함을 끝내 마지막 눈물로 표출하시던 아저씨....
딸에게는 절박하고
아빠에게는 절망스러운 그 상황이 어쩌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또다른 길이 열릴 것이라고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서로 토닥였다.
그 부녀의 상황이 70년대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더욱 어렵게 지냈던 내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나도 전문대의 입학금만 부모님이 대 주시고 나머지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주유소 알바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썼고
다시 1년의 직장생활을 하며 입학금을 모아 간호대를 들어갔다.
그리고 반복된 아르바이트...
실습으로 더이상 알바를 병행할 수 없어
끝내는 1년 휴학을하고 미리 따놓은 조무사 자격증으로 하루에 300명이 넘는 환자를 보는 이비인후과에 다니면서 학비를 저축해야 했다.
점심은 초라한 도시락이 전부였고
지랄맞은 성격의 원장 때문에 1년동안 밑의 동생이 10명쯤은 바꼈다.
수시로 결근하는 철딱서니 동생들 덕에 나는 초인의 힘을 내어 300명의 환자를 접수하면서 약을 갈아댔고 포장하고 수납까지 했다.
(그때는 의약분업이 이뤄지지 않아 병원에서 약을 주던 시절이었다. )
항상 퇴근은 1시간을 오버하기 일쑤였고
나는 저녁 먹을 힘도 없이 대충 씻고 쓰러져 잠이 들면 다음날 알람이 울리면 침을 흘리는 개처럼 반사적으로 출근을 하였다.
그렇게 한달을 미친듯이 살아도 겨우 90만원정도의 월급이 고작이었다.
최소한의 생계비 30만원으로 교통비와 통신비, 생활비를 다 해결해야만 했기에 참 춥고 힘든 겨울과 여름을 나야만 했다.
힘들고 버겁고 두려운 세상을 홀로 서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참 뜨겁고 멋진 청춘이었다.
그래서 나는 슬프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내 길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내는 내가 참 자랑스럽고 멋지다고 믿었다.
그때의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참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교회의 장학금과 알바한 곳에서 몇 십만원씩 더 챙겨 주셨고 1년간 다닌 병원 원장님은 내 상황을 아시고 퇴직금에 50만원을 더 챙겨 주셨다.
참 순수하고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운이 좋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숨이 넘어갈 듯 절박한 순간일수록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돌아가는 유연함도 인생에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일,
이 길 아니면 내 인생은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두려움 없이 씩씩하게 내 길을 찾으려 노력하고
안 되는 상황 앞에 좌절하기 보다는 만족하면서 차선책을 찾아보는 것 또한 또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젊은 청춘은 불안한 미래와 초라한 자신의 지금 모습에 슬퍼하고 어깨가 쳐지지만 시간은 많다.
멈추지 말고..주저앉지만 말고 천천히 길을 찾으면 되는 것이고
그 청춘의 부모는 그런 자식의 곁을 조용히 지켜주고 할 수 있는만큼의 지원을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은 자식을 믿어보는 수 밖에 없다.
아둥바둥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들....
그럴 듯하게 멋지지는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내는 소박한 인생들....
잘살든, 못살든 우리는 같은 지구별의 동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