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도 설날은 중요한 명절 중 하나다. 당연히 첫째 아이의 학교도 긴 연휴를 맞아 들썩들썩 신이 났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첫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 학기가 지났다. 일단 학교에 입학하면 아이가 영어 때문에 힘들겠구나란 생각은 했지만 내가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며 가며 말하는 정도야 대충 하면 되겠지 뭐 이랬다. 하지만 그건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게 부모의 참여도가 정말 높았다. 크리스마스나 핼러윈 등 무슨 날이다 하면 학부모들이 학교를 꾸미고 아이들에게 선물꾸러미도 돌리며 일 이주에 한 번씩 미스터리 리더가 되어 책도 읽어준다.
저번 학기는 주저주저하다 행사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학부모에게 준비해 줘서 고맙다며 땡큐만 연발하는 나날들이었다. 행사날은 빠짐없이 갔지만 내가 게임을 준비한다거나 선물을 나눠주는 건 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교실 구석에 서있었다. 아 정말 민망했다. 영어도 자신이 없고 원래도 뒤에서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해서 내가 한다며 손드는 게 쉽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처음 맞는 명절. 그것도 설날! 이번엔 복주머니라도 돌려야지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예쁜 복주머니를 주문하고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보내신 전체 메시지에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즐거운 설날! 금요일에는 아이가 빨간색 옷이나 전통 복장을 하고 등교합니다. 그리고게임 등 자원봉사를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거예요!'라는메시지가 한국, 중국 부모님 꼭 도와주세요!로 읽혔다.
반 아이 12명 중 중국인 2명, 한국인 1명. 중국인 엄마들은 당연히 뭐라도 할 건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한국과 중국 둘 다의 명절에 대해 배우는 첫째가 실망할 거 같았다. 그때 2학년 엄마들이 미리 진행한 행사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여러 전통놀이 중 '딱지'가 정말 한눈에 확 들어왔다.
이거다 이거. 딱지라면 내가 쉽게 만들 수도 있고 한 20분 정도 아이들이랑 신나게 놀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성급히 선생님께 연락은 드리지 않고 일단 딱지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 딱지 접는 법 모르는구나.."
유튜브를 보고 쉽다고 생각하며 금방 아이 손바닥 만한 딱지를 여러 개 만들었다. 그런데 시험 삼아 쳐 봤을 때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딱지란 건 정말 잘 안 넘어가는구나. 6살 애들은 이거 못하겠다."
두꺼운 종이로 만들고 얇은 색종이로도 만들어보고 그 안에 두꺼운 종일 넣어보기도 하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봤는데 안 넘어간다. 이렇게 어려워서 오징어게임에도 나온 걸까. 하다 하다 안 돼서 다시 검색해 봤다.
이번엔 '잘 넘어가는 딱지'로 검색어를 바꿨다. 당연히 절대 안 넘어가는 절대 딱지 이런 것만 나오지 아이들이 쉽게 넘길 수 있는 건 찾기가 어려웠다. 포기할까 하다 양면딱지라는 걸 봤다. 한 면이 평평한 딱지와는 다르게 양쪽이 딱지로 되어 어린아이들도 손쉽게 뒤집을 수 있다.
아이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서 다음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한국의 전통놀이인 딱지치기를 설명해 주고 싶어요."
선생님과 약속시간을 정하고 나서 밤마다 종이를 자르고 접으며 24개의 양면딱지를 만들었다. 어릴 때도 안 해본걸 34살이 되어서 열심히 하고 있자니 정말 웃겼다.
내가 이 나이에 말레이시아까지 와서 딱지를 접고 있다니!
그리고 드디어 금요일. 아이들에게 할 말을 중얼중얼 연습하며 황금초콜릿으로 가득 채운 복주머니를 챙기고 소중한 딱지도 챙겼다. 이게 뭐라고 어찌나 떨리던지. 신입사원 때 전사 직원교육을 담당했던 때만큼 떨렸다. 고작 12명의 아이들 앞에서 하면 되는 거였는데도 말이다.
막상 아이들 앞에 서니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6살 아이들은 저 딱지를 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거 같았다. 조그만 양면딱지는 스페셜하게 만든 거라는 나의 설명이 무색하게 큰 딱지를 도전하는 남자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쨌든 20분은 눈 깜짝할 세에 지나갔고 해피 뉴이어라는 인사와 함께 복주머니를 첫째 아이에게 부탁하고 나왔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한 번이라도 넘기면 신나서 방방거리고 못 넘겨서 입술이 뿌루퉁해져서 나와있는 모습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것도 있었다.
애들은 복주머니를 훨씬 좋아했다. 물론 그 안에든 초콜릿 때문이 컸을 거다.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주머니가 예쁘다며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딱지는 놀 때만 재밌었던 거 같다. 아무렴 어떤가 잠깐이라도 좋았으면 된 거지.
학교활동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4월에 미스터리 리더도 신청했다. 재밌고 따뜻한 책을 잘 골라서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