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by 파로

독서실에서 새벽 1시가 다 되어 들어온 은율이의 얼굴이 벌겋다.

깎아놓은 과일을 꺼내주었더니 가방만 내려놓고 식탁에 앉아 한입 오물오물하다가 말한다.

“엄마, 난 이제 개념엔 빈데가 없는것 같거든?

근데 오늘 사탐 모의고사를 두개나 풀었는데 등급이 안오르는거야.

두번째꺼 풀고나서는 너무 속상해서 울면서 오답하다 왔어.”

아차하는 순간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뭘 울어‘ 같은 너무 속편한 위로를 하거나

(은율이 말대로) 극 T처럼 현실적인 조언을 함부로 내뱉거나

정말 최악의 경우 별 생각없이 그러게 일찍 시작하지 그랬니, 같은 말이라도 하면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는 무시무시한 덫.

잠깐 고민하다가 전에 싸울때 은율이가 부탁했던대로 말했다.

“속상했겠다”

그 말 한마디에 금세 다시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은율.

“엄마, 나 할 수 있을까?”

과일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아이의 눈을 보며 한번 씩 웃는다.

지금 네 불안이, 그 눈물나는 속상함이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고되지만 반짝이는 긴장이라는걸, 너도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

열아홉 고3을 지나보내며 네가 얻었으면 하는 것이

무언가를 꾸역꾸역 해보는 것, 싫어도 참고 해보는 것,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성취감도 패배감도 안전하게 경험해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싶은 내 마음도

너는 아마 아주아주 한참 후에나 알게 되겠지.

“할 수 있지, 이렇게 열심히 하면 오늘보다 내일이 낫고 내일보다 모레가 낫겠지.

그런데 은율아, 시험은 절반은 운이어서 누구라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안따를 때도 있어.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데까지 해보면 돼.

설령 니가 원하는 결과를 이번에 얻지 못한대도 니 인생에 수능 시험 한번?

지금은 버겁고 큰일 같겠지만, 길게 보면 그거 정말 별일 아니야.

조금 번거로울 순 있어도 절대로 큰일은 안나.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잘 되든 안되든, 그 때 니 마음이 가는대로 다음길을 결정하면 돼.

너는 아직 스무살도 안됐고 시간으로는 니가 제일 부자야.

괜찮아.”

마음이 몰랑해진 아이에게는 다정한 위로가 그대로 가 닿는다.

무엇이든 안전한 쪽으로 백업이 필요한 아이.

‘만약에’, 에 대한 안전망이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아이.

지독하게 모자란 ‘사춘기딸 엄마’ 시기를 벗어나며 비로소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나의 아이.

몇번이나 불안한 마음을 반복하며 괜찮다는 위로를 청하더니,

그제야 우걱우걱 복숭아를 삼키고는 다시 말간 얼굴로

씻고 문제집 조금 더 보고 자겠다며 자리를 뜬다.

.

.

그리고 한시간 뒤,

제발 고만 서성거리고 빨리 자라고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위로를 너무 잘해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