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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처서 매직

by 현주영

지난 8월 밤 11시 우리 집 아파트에 불이 났다. 신혼집으로 이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리 바로 밑, 밑에 집에서 불이 난 것이다. 오밤중 갑작스러운 소방차와 소방대원들의 등장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검게 타는 냄새가 나는 와중에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과 소방대원의 다급한 외침으로 당시 상황은 대혼란 그 자체였다.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불난 집의 해당 부분이 검게 그을리긴 했으나, 우리 집에까지 피해가 오진 않았다. 간밤의 그 난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길 아침이 밝았다. 문득 어젯밤 저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을 생각하니, 예전 출근길이 떠올랐다. 그때는 출근길이 불이 나지 않았어도 질식할 것 같았다.




남편을 만나기 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는 출퇴근길에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사당역에서 강남역까지 가는 20분 남짓한 시간, 2호선 지하철 출퇴근길엔 늘 직장인들이 제철 맞은 도루묵알처럼 꽉꽉 들어차 있었다. 특히 훅훅 찌는 여름날이면 사람들 사이에 껴서 졸도할 것같이 숨이 막혔다. 그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나 노랫소리로 겨우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데, 그 이어폰이 나에겐 일종의 귀에 꽂는 산소마스크인 셈이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응원해 주기는커녕 가뜩이나 힘든 하루를 기다리고 있는 처음과 마지막이 두 팔 벌려 ‘어서 와, 지옥철에’를 외치는 후끈한 지하철이라니. 그 20분은 마치 나에게 불난리 속에서 들릴 것에 실려 가고 있는 산소마스크 낀 응급환자의 그것과 같았다.


2023년 9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와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바로 지금 현 남편 될 사람이다. 이 남자가 구 남자친구였을 때, 그 당시 나는 직장이 멀어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이었다. 평일엔 새벽 5시에 일어났는데, 내가 일어나기 1분 전쯤 모닝 카톡을 보내주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회사와 집이 10분 거리라 굳이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며칠만 해 주다가 말겠지 했지만, 내가 그 회사와 계약이 종료되어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될 때까지 새벽 5시 기상 카톡은 계속되었다. 퇴근을 하게 되면 일종의 신고식처럼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퇴근 연락을 하는데, 그 신고식을 치르면 하루 업무가 끝났음을 실감하면서 심호흡한다. 이제 쉴 일만 남았다. 불나기 직전까지 돌아가던 머릿속 업무 모터를 끄고, 오늘 있었던 별 볼일 없는 이야기들을 조잘거리며 식힘과 복구의 시간을 가진다. 기상할 때부터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또 회사에서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 길고도 짧은 출퇴근 4시간은 나에게 처서에 부는 바람과 같았다. 하루 중 가장 뜨거운 회사 생활 8시간의 열기를 식혀 주는 시간. 선선한 가을에 접어들면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지는 이른바 처서 매직이 나의 하루에 들어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밤 11시 우리 집 아파트에 불이 났다. 어느 날 퇴근 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9월 ×일부터 9월 ××일까지 N층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니 소음에 양해 바란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 집도 한바탕 불난리를 겪었다가 이제 식힘과 복구의 시간을 가지는가 보네. 과연 모든 일상이 한때 뜨거웠다면 자연스럽게 식힘과 복구의 시간을 가지기 마련이구나.’ 처서 매직이 들어 있는 나의 일상. 가을 절기를 닮은 나의 하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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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_화재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던 날_by.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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