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크리스토퍼 놀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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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 타기를 즐긴다. 놀이 동산에서 느끼는 짜릿함이 좋다. 하지만 느린 기차 여행이 더 좋다. 낭만 가득이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감흥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놀랍고 대단하지만 거기까지 일 수 있다. 놀라운 것과 훌륭한 것은 다르고 어마무시한 것과 장엄한 것 차이는 크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놀랍고 어마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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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어떤 정점이다. 자본의 대단한 투입과 배우들의 잘짜인 연기와 감독의 연출과 현란한 편집 능력과 음악이 합쳐서 뿜어내는 <오펜하이머>는 눈부시다. 전기 영화가 이렇게 리드미컬할수가, 어안이 벙벙하고 순식간이다. “와~!“ 수많은 인물의 등장과 대사, 현란한 교차 속 한 인물의 일생이 드라마틱하고도 막힘없이 흐른다.
대단한 감독(Director) 놀란이 젠체하고 으쓱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화는 거침이 없고 노골적인데다 뻔뻔하기까지하다. 배우들은 어떤가, 당대 연기 베테랑들과 너무나도 좋은 주연급 조연들이 한•두 장면을 위해 기꺼이 출연했다. 음악이 아니라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 루드비히 고란슨은 끝간 데까지 밀어부치며 새 시대의 존 윌리암스와 한스 짐머가 되길 과하게 욕망한다.
“당신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별 이야기도 없으면서 예술영화인 척 허풍을 떠는 영화와 상투적인 이야기에 불과한데도 자기가 예술영화인 줄 아는 영화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쪽에 침을 뱉어야 할까”(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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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은 더욱 디테일하고 세련되게 진화하고 있지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를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서사, 영화가 될 수 없는 "사건(affair)"은 없겠다. 하지만 매력과 감흥은 점점 떨어진다. 놀란이 부리는 마법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느낌, 띵하고 멍하다. 게다가 곡절 많은 한 인생을 다루는데 머뭇거림이나 주저가 없다.
흑백과 컬러 장면의 교차가 쫀득쫀득하고 밀도가 높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관객의 멱살을 그러잡고 원하든•원하지 않든, 전능해진 감독의 연출과 편집은, 그야말로 바늘 자국 하나 없이 매끈해진만큼, 눈과 귀가 쉬어갈 틈과 생각할 여백이 사라지면서, 영화가 다 끝나고 느끼는 이상한 헛헛함,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대단한데 마음에 와닿는 장면과 순간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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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분열과 핵융합, 곧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유비는 두 인물의 청문회를 흑백과 컬러로 꽈배기처럼 꼬아 구조적 대비를 이룬다. 놀란은 자신이 구상하고 만든 서사 구조(시간 통제와 지연)에 흠뻑 취한 듯 보인다. 거기 밀착한 촘촘한 편집이 모든 걸 집어 삼킨다. 오펜하이머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4부 내용은 그래서 납짝해지고 쪼그라 든다.
구조의 선명성을 부각하려는 욕심이, 서사의 다층성, 즉 원래도 범상치 않은 인물인데, 야만의 시대, 정치적 풍파를 겪으며 인물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스산하고 서늘한 풍경을, 킬리언 머피를 당겨 잡(클로즈업)아 움푹 패여 갈 곳 잃은 눈동자를 비추는 것으로 대신하는 패착에 내몬다. 배우의 대단한 연기마저 삼킨 서사 구조와 편집은 관객 입장에서 몹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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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연기와 연출 사이 길항은 미묘할 때 역동적일 수 있다. 캐릭터를 배우가 압도하거나 배우의 연기가 각본/연출에 기가 눌릴 때, 연기는 들뜨기 미련이다. 킬리언 머피의 대단한 연기는, 놀란의 각본과 연출, 이미 편집을 염두한 놀란의 구상에 매여 고도로 계산되었다. 그래서 대단했지만 그런데 보기 아쉬웠다. 게다가 이번에도 놀란 영화의 여자들은 죄다 도구적이다.
연기도 배우가 숨 쉴수 있는 연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자연스럽다. 연기와 연출, 둘 사이 길항은 쏠리지 않고 미묘하고 역동적일수록 승산이 높다. 숙련되고 경력을 쌓고 세월이 흐를수록 노련하면서도 ‘꾼’이 되지 않는 것은 역시나 어렵다. 의도치 않은 빈틈이 새로움과 역동을 밀어 올리는데, 모든 것을 장악하고 꽉 쥘수록 이상하게도 활력은 사라진다.
”유럽인의 가장 이상한 취향 중의 하나는 아메리카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다.“(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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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실험 후 겪은 양심의 가책과 이후 활동, 군축 주장과 핵전술•핵전략 사이 오락가락했던 그의 망설임 혹은 확신과 자기 경멸•자책 사이, 모순에 빠진 모순적인 한 인간의 비애와 방황에 관심이 없다. 야만의 시대, 국가 폭력의 잔혹함과 비열함에도 무관심하다. 전기 텍스트와 사력다해 뒹군 흔적이 덜 보인다. 영화 서사(플롯) 구조는 그저 두 인간 사이의 복수 치정극처럼 그린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시간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리처드 뮬러)
놀란이 핵폭탄을 터뜨렸고 핵폭발을 일으켰다. 그 장면은 소리 지연까지 동원해 힘을 잔뜩 줬다. 하지만 남는 게 없이 싹다 사라졌다. 아니 한 스푼의 흥행과 천재•거장•걸작이라는 찬사가 남지 싶다. 그렇게 관객은 영화 한 켠 어디에도 낄 자리가 없다. 참 어려운 문제다. 정점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코 앞이라는 의미다. 놀란은 놀란을 보란듯이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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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에서 마켓팅, 그 중에서 브랜딩은 회사의 존재 이유와 잇닿은 철학과 가치의 문제지만, 현실에선 자본 투입과 셀럽 동원, 물량 공세에 달렸다. 동어반복, <오펜하이머>는 실감나지만 현실감은 떨어지고 자신감이 지나치고 모든 게 과하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압도해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뺏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매혹은 어렵다. 국내 흥행도 글쎄다. 반복해 쓰지만 신들린 편집, 곧 악마의 편집 탓에 킬리언 머피의 연기는 색이 바랬다. 하지만 전기 영화를 이보다 잘 만들 수 있을까. 아메리카는 예술이 '자본의 중력'을 견딜 수 있는 영토인가, 아니 아메리칸은 '예술의 강력'을 그러안을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특히 시끄러운데 크리스토퍼 놀란 탓이 아니다. 내가 나이 든 탓이다.
쓰고 나니 정성일스럽다. 이제는 남다은스럽고•김혜리스럽고•이후경스럽고 싶은데 말이지.
덧)
최근 개봉한 다섯 글자 제목 영화 셋, <오펜하이머>•<비밀의 언덕>•<러브 라이프> 중에서, 하나만 보려면 <비밀의 언덕>을 보시라. 만약 두 개 보려면 <비빌의 언덕>과 <러브 라이프>가 좋겠다. 극장에서 본다해도 마찬가지, 셋 볼 수 있으면 <비밀의 언덕>을 두번 보라. 스펙터클이 진심을 이길 수 없고 거대한 폭발이 소소한 풍경에 비할 바가 아니다.
놀이 공원은 늘 거기 똑같이 있다. 테마를 매번 바꿔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으로 족하다. 늘 곁에 있지만 매번 조금씩 변화는 풍경, 시간을 머금은 관계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놀란 탓이 아니다. 내가 늙은 탓이다.
“내 그림자가 빛을 사랑하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권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