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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Jul 05. 2022

[북리뷰] 김학준_보통 일베들의 시대

경기도 파주:2022, 오월의봄. "논문이 책이 되어 나올 때까지"

1. 논문 잘 쓰는 방법에 관한 책도 나오는 시대.

 

<2022 서울국제도서전>을 관람하다가 몹시 놀라운 책들을 만났다.

논문 쓰는 방법에 대한 책도 시중에 나왔다. 책 쓰는 법에 관한 책도 넘쳐나는 시대고,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논문을 쓰는 인구도 늘어난 터라 수요가 없진 않을 테다. 하긴 친형제 중에 둘이 석사논문을 쓰지 못해 학위를 받지 못했고, 사촌 중에 하나도 논문을 쓰지 못해 대학원 수료인 상태라서 더 크게 실감하게 된다. 15년 전쯤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촌의 경우도 자기가 무슨 논문을 썼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함께 책을 쓰자고 꼬드긴 고등학교 선배 역시 석사논문을 쓰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중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논문을 쓰지 않아도 토익 성적만으로 학부 졸업이 가능해졌고, 특수대학원을 통하면 논문 한 번 써본 적 없이 박사과정에 들어서는 경우도 제법 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예전 같지 않은 연구윤리와 논문 심사로 인해 문턱이 높아져서, '방석집 논문 심사'는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량 미달의 학위논문이 꽤나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 

사회과학이 됐든, 자연과학이 됐든 과학적 연구 방법에서 통계를 다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사회과학용 통계 프로그램으로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툴이 SPSS라고 한다. 학사논문 이후로 논문을 써본 적 없는 입장에선 SPSS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일을 할 때도 기껏해야 엑셀이나 쓰면 되는 간단한 통계나 다루어 봤기에, SPSS는 거의 안드로메다와 비슷한 심리적 거리를 보여준다.

 통계의 유효성 검증이 논문에선 무척이나 중요한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SPSS를 활용해야 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한다. 논문을 쓸 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외에는 쓸 일이 없는 이 계륵 같은 존재는 꽤나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간혹 애제자를 위해 이 과정을 대신해주는 교수가 없진 않은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결국 책을 사보면서 공부를 해야만 논문을 쓸 수 있을 테다.


 올해 초에 회사 대표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작년에는 저널 게재 논문의 원고부터 시작해서, 박사학위 논문까지 리뷰를 해주어야만 했었다.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훈련되지 않은 방식의 글쓰기인 논문에 대해 그리 주효한 리뷰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휴먼교수체'를 교정해주는 것만큼은 제법 잘 해낼 수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꼰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한 공문서 문체가 논문 쓰기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더 재밌는 사실은 영문번역체까지 가세하는데, 그렇게 매끄럽지 않은 글쓰기가 '글의 품위'를 유지해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대표의 쓸데없이 각 잡힌 문장들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논문 심사 일자가 다가오자 막바지에 쓴 문장들은 난잡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교정하지 못하고 심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해당 기수의 최고의 논문이 되었다고 한다. 주제의 참신함부터 시작해서 통계의 유효성 검증이나 형식적 완성도까지 꽤나 잘 된 논문이었다며 지도교수가 극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컨설팅 워크숍에서 만난 대표의 동문들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논문에서 잘 다듬어진 문장의 중요성은 꽤나 후순위로 밀리는 모양이다. 



2. 논문으로 대중서를 쓰는 법을 다룬 책도 나오는 시대


관악구의 동네서점인 이나영책방의 인스타그램 피드(https://www.instagram.com/p/CfGH26iLS7o/)에서 손영옥의 『내 논문을 대중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석사논문을 바탕으로 써낸 대중서, 『보통 일베들의 시대』를 동네서점 바로대출제로 대출했다가 구입한 직후에 피드를 확인했었다. 아무래도 그 두 권의 책이 같은 사진 속에 들어와 있었기에 더 눈에 띈 것 같다. 마침 그날 회사 대표의 박사논문에서 시작한 대중서의 편집디자인본 pdf파일이 출판사로부터 넘어오기도 했다. 마치 '운명의 데스티니'처럼 한꺼번에 나에게 밀려든 서로 닮은 듯한 상황 때문에, 이번 리뷰에서는 '학위논문으로 대중서 쓰기'도 언급해야겠다 싶었다.


 학위논문을 대중서로 바꾸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논문을 이만큼 썼으니 조금만 더 보태면 되겠지'란 착각에서 시작해서, 원고 작업 내내 '이건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꽤나 숨이 막혀 온다. 반년쯤을 작업시기로 잡고 덤볐다가 해를 넘기는 정도는 애교고, 여러 해를 보내다 보면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8년이나 묵힌 석사논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는 지금 이 시점에 적절하게 잘 엮어진 책이 됐는데, 참 대단하다 싶다. 

 지난해 하반기에 이미 회사 대표는 박사논문을 가지고 대중서를 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고, 나는 그 원고 작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을 결의했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들었던 몇 권의 책을 읽다 보니,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쓴 책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말에서는 하나같이 '논문은 논문, 책은 책'이라면서 '완전히 새로 쓰는 지난한 작업'임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 문제점을 대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나, 2021년 한 해 동안 저널용 논문 2편과 박사논문을 끝마친 놀라운 속도에 스스로도 취해있는 사람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넘치던 자신감은 딱 세 달만에 '토할 것 같다'는 징징거림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말이다. 출판사와 편집회의를 할 때마다 목차가 뒤집어지고, 원고가 뒤집어졌다. 논문으로서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대중서에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용은 꽤나 적었다. 나머지를 채워 넣는 작업, 특히나 하나의 짜임새 속에서 응집력 있게 내용을 직조해 내야 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 말리는 일이었다. 이때 대표와 함께 겪으며 고민했던 내용들의 상당수가 『내 논문을 대중서로』에 기술되어 있었다. 아직 출판사와 함께 책을 출간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나의 빛나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책을 써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방주사 역할은 충분히 해낼 듯하다.


 대표는 원고 작업을 하면서, 논문에서 다룬 통계 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해야 예상 독자에게 저항감 적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꽤나 고민했었다. 그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던 비 내리는 봄 저녁을 통음으로 보내기도 했는데, 덕분에 나 역시 숙취로 고생했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에서도 자연어의 빅데이터 처리에 관한 엄청 길고 자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은 쉽게 쓰려고 많이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는 챕터가 등장한다. 읽어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방향성으로 앞으로 데이터를 다룰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제법 되어 있었다.

 대표가 더 쉬운 방식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다'며 손 놓았던 부분은 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웠었다. 이제 그에 대한 근심은 조금 줄여도 될 듯싶었다.



3. 보통 혐오의 시대, 일베의 보편화


 '일베 따위'도 각 잡고 연구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으나, 직접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던지라, 이 주제에 대해 꽤나 목말라 있었다. 일베에 대한 연구들과 관련된 풍문은 '다들 꽤나 표피적이고 교조적이라서 일베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였기에, 더더욱 갈증을 보탰더랬다. 그 타는 목마름을 『보통 일베들의 시대』가 거의 해갈해 주었다.


 2016년 10월 국정농단 사태가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꽤나 흉측한 혐오의 언어들이 인터넷에 팽배했다. '잃어버린 9년' 동안 온갖 음모론에 기대어 자위해왔던 민주당 지지층은 믿기 힘들 정도로 흉악망측한 프로파간다를 쏟아냈다. 2014년 일베의 광화문 폭식 투쟁 당시의 혐오의 강도를 가볍게 맞추어 버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인터넷 담론장의 흉포화를 김학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지금의 '일베'란 일반화된 관념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2010년 이후 한국 인터넷 담론장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주도적으로 이슈를 끌고 가지 못한 진보담론의 리더십 부재. 둘째, 다음(아고라)을 필두로 한 ‘진보’ 커뮤니티의 게토화. 셋째, 두발자유화 문제에서부터 2015년 4월 이후 새롭게 그어진 반여성 전선에서까지 볼 수 있는 ‘진보 네티즌’ 자체의 보수성. 넷째,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상대편을 악마화하는 성찰 불가능성. 이런 문제는 지금의 일베가 나타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을 제공했다. - 49쪽


 일베적 혐오 표현이 비단 갑툭튀의 별종이 아님을 확인한 이후, 일베의 심리적 기제에 대한 제법 설득력 있지만 완벽하진 않은 설명들이 이어진다. 보다 깊은 회의적 사고를 가져가기에는 충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어서 주목해 볼만하다.

촛불집회, 소급하면 거의 모든 집회와 시위에 대한 일베 이용자들의 거부감은 상당한 수준이다. 특히 이들이 혐오하는 것은 ‘불법’ ‘폭력’ 집회이다. ‘신상털기’와 ‘패드립’으로 악명 높은 일베에서 ‘합법’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신념’과 ‘믿음’을 논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라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근거를 찾아 나선다. 이 때문에 518을 ‘광주 사태’라고 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당대의 ‘법’이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끊임없이 갑론을박하는 것이다. - 177~8쪽


 일베에 대한 일반적 특질을 설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국사회 일반에 만연한 특질이 아닌가 싶은 지적들이 이어진다. 일베를 하면서 내재화한 특질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내재화를 강요받았던 '철듬' 또는 '세상을 아는 것'이란 이름의 서브컬처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하여 자기 초극의 윤리적 과제는 타인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하는 폐단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평범 내러티브가 자신의 고통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 내러티브까지도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평범 내러티브의 확산과 내면화는 고통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타인에게 ‘나는 참아냈는데 너는 왜 떼를 쓰느냐’는 식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된다. 따라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든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고 해결 또한 스스로 해야 한다. 개인이 겪는 문제에 국가와 체제는 개입한 바 없으며, 각자는 ‘노루가 사냥꾼 손을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새가 그물친 자의 손을 벗어나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정치는, 사회적인 것은 이렇게 사라진다. - 260쪽


 세대론을 정리하다 보면, 반드시 고민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 '공정'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공정 담론'은 무척이나 능력주의와 연관이 깊은데, 이를 더 고민해보려고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사놓았다. 문제는 사놓고 발췌독을 한 이후로, 정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놓은 책들은 언제나 빌려온 책들에게 순서를 빼앗기고 있는데, 이번만큼은 연관된 주제이기도 해서 다시 펼쳐볼 가능성이 높아졌다. 좋은 독서 경험은 이렇게 다른 독서로의 확장력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지식욕을 자극하는 독서가 즐거운 독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능력주의의 한국적 변종'인 평범 내러티브가 비단 일베만의 고유한 멘털리티가 아님을 지적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부분이기도 하다.

각자도생의 윤리는 평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또 다른 도덕적 정당화 기제인 능력주의를 만나 패자를 멸시하고 승자를 물신화하는 데 이른다. 승자로서 패자를 멸시하는 감각이야말로 일베의 열광적인 혐오를 설명해주는 기제인바, 능력주의의 한국적 변종이라 할 만한 평범 내러티브는 어떤 말이나 행위를 ‘일베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직감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남는 문제는, 과연 평범 내러티브가 일베만의 고유한 멘털리티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270쪽


 나는 2018년 '워마드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도촬 사건'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의 억지 논리와 그에 이은 '혜화동 시위'의 터무니없는 프로파간다를 접한 이후로, 그 진영에 꽤나 큰 반감이 가지게 됐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진보적 씹선비'에 가까웠던 나였기에, 일베적 형식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꼴페미'들에게 강한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는 좀 다르지만, 능력주의에서 바라보는 진영 담론의 문제점만큼은 흥미로운 지적이라 할 수 있다.

‘트페미’로 대표되는 영영페미니스트들의 저항적 담론 역시 기실 능력주의적 토대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도덕적 정당성과 필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공부하지 않은’ 남성들의 ‘무지’를 멸시하는 능력주의 전략을 취했다.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부조리한 문화와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능력주의가 가진 해방적 측면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해방의 비전을 보여주는 바로 그만큼,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가 느낄 모멸감의 앙상블은 공동체를 점점 더 약화할 수밖에 없다. - 335쪽


진짜 저같이 여론 선동 잘하는 사람이 
흑화해 가지고 그러고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기대해도 될 것.
- 이준석,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 중에


 그리하여 이준석을 "일베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정돈된 형태의 인물"로 정리하면서 "일베적 멘털리티와 행위는 더 이상 사이버 공간의 하위문화가 아니다"는 선언은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무척 즐거운 독서였기에 징징거리는 리뷰가 되지 않았다. 징징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꽤나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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