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vs. 표현 방식의 고찰
모임 후 같이 일하는 선생님을 내려드리고 돌아 나오려던 길이었어요. 아파트 앞 2차선 좁은 도로인데다 앞은 또 막다른 길이라 좀 애매한 거에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앞에 있었어요.
'여기서 그냥 돌려서 나가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한 남학생이 저 멀리서 횡단보도로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덩어리를 짊어진 듯 책가방을 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표정은... 음, 모든 직장인들의 월요일 아침. 딱 그 표정이었어요. 아, 이 친구, 모의고사라도 쳤나? 힘든 일이 있었나? 잠시였지만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쓰덥더라구요.
자, 이제 선택의 순간입니다.
제가 먼저 진입하긴 했으니 그냥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 멈춰서 이 지친 영혼을 건너게 해줄 것인가. 제 마음속에서 양심과 피곤함이 팽팽하게 맞섰어요.
"야, 너도 저런 시절이 있었잖아. 그리고 네가 길 건널 때 이런 상황 맞닥뜨렸을 때 차가 먼저 지나가 버리면 욕할 거잖아."
저도 일을 하고 돌아가던 길이라 약간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 시절 그 아이의 마음을 왠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차를 세웠습니다.
차를 세우는 그 짧은 순간, 시간의 상대성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잠깐의 시간인데, 그 고등학생 친구에게는 얼마나 억겁의 시간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뛰거나 빨리 걸을 힘도 없어보이는 그 친구는 모래 주머니라도 찬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저를 향해 손을 번쩍 들더라구요. '뭐하는 거지?' 자세히 보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번쩍 든 팔 끝에는 엄지가 치켜세워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주 쿨한 표정으로 말이죠.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저항없이 터진 제 작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채웠습니다. '어머. 나 방금 엄청 멋진 행동을 한거네.' 라는 생각까지 들었죠. 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살짝 눈물까지 날 뻔했어요.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제가 투영된 걸까요? 아니면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남의 새끼도 제 새끼처럼 보게 되는 마음이 싹튼 걸까요?
그 순간 깨달았어요.
10대들을 급식충이라는 둥 생각 없는 Z세대라는 둥 호도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 글과 콘텐츠들만 보고 그런 줄만 알았죠. 하지만 이 지친 고딩도 피곤함과 귀찮음을 뒤로하고도 제 때에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구나 생각하며 나조차도 SNS에 속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신의 고마움도 미안함도 제 때에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보다 훨씬 낫구나.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각 개인의 문제였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네, 맞아요.
저는 그저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멈췄을 뿐인데 이렇게나 큰 감동과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오바일까요? 하하. 하지만 그래도 좋네요. 이런 작은 순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뭔지 아세요? 저는 그날 이후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늘 잠깐 정차하고 혹시나 건널 사람이 있나 기다립니다. 혹시 또 다른 '엄지척'을 만날까 싶어서요. 아직은 못 만났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 작은 기다림이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이 이야기를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요?
어느 날 제가 아파트 앞 좁은 도로에서 횡단보도에 정차해 남자 고등학생을 지나가게 해줬더니 그 아이가 절 보고 엄지를 치켜 세워줬습니다.
더 짧게는
어느 날 횡단보도에 한 남자 아이를 건너게 기다려줬더니 그 아이가 저를 보고 따봉을 날려줬습니다.
내용은 전달이 되지만 이 글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죠.
소재 vs. 전달 방식
마케팅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챗GPT나 클로드와 같은언어 모델 나아가서는 AI를 활용하여 효과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속에서 우리는 종종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좋은 스토리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입니다. 흥미로운 소재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일까요?
소재와 방식, 물론 둘 다 중요하지만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소재가 요리에 쓰이는 재료라면 방식은 조리법이겠죠. 제 아무리 어디서도 못 구할 엄청난 재료를 구해왔다 하더라도 요리 솜씨가 꽝이라면 음식 맛은 말할 것도 없겠죠.
우리 주변에는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깊은 감동과 의미를 발견하곤 하죠. 그것이 바로 '방식'의 힘입니다.
제가 처음에 들려드린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요?
- 횡단보도에서 학생 한 명을 기다려준 것
- 그 학생이 엄지를 들어 보인 것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둘러싼 맥락, 제 내면의 생각들, 그리고 그 경험이 제게 남긴 여운... 이런 것들을 함께 풀어내면서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게 되었죠.
우리는 종종 '대단한 이야기'를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런 대단한 사건보다는,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포착하고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토리텔링에서 '방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겪은 그 작은 순간은 겉보기엔 평범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과 의미를 풀어내자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횡단보도에서의 짧은 만남,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눈빛, 동네 슈퍼에서의 잠깐의 대화... 이런 순간들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어요.
물론 AI의 발전으로 콘텐츠 제작이 더 쉬워졌지만, 제가 느낀 감동과 깨달음은 AI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감성과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저는 가능한 한 자주 그 날의 특별했던 순간을 돌아보며 짧게라도 글로 남기려고 해요. 때로는 서툴고 어설플 수 있겠지만, 그 속에 진실된 제 모습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들이 모여 제 인생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 숨겨진 특별한 순간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길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