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소설가 구병모. 그의 작품 "파과"(뭉그러진 과일)가 창작뮤지컬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무대 위에 올려졌다. 예습을 위해 책을 읽고는 도대체 이걸 무대 위에 어떻게 올릴까 궁금했다.
이지나 연출, 서정주 무술감독 등 커리어 탄탄한 제작진과 조각 역에 차지연, 구원영. 투우 역에 신성록, 김재욱, 노윤, 류/강박사 역에 최재웅, 박영수, 지현준, 어린 조각 역에 유주혜, 이재림. 그 외 앙상블들까지 걸출한 배우들이 뭉쳤다.
늙은 살인자와 그녀의 방역대상이었던 아버지를 가진, 한때는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그녀와 같은 길을 걷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영화 "길복순"과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며 관객들을 무대 앞으로 초대한다.
6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인 조각, 그러나 그녀도 나이와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어느 날 방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만난 늙은 유기견을 보호하게 된다. 그녀는 유기견에게 무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언제라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살짝 열어둔 문 밖으로 살길을 찾아 떠나라고 교육한다.
투우는 오래전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살인자는 자신의 집에 임시 가사도우미로 들어와 세심히 약을 챙겨주었던 이름도 모르는 그녀. 투우가 결국 방역업계로 흘러든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까, 아니면 그녀의 뒷모습 때문이었을까
극에서는 투우의 회상과 계획이 한 축을 담당하고, 또 한 축은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각을 처음 방역의 세계로 이끈 류와의 강렬한 기억들,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류의 목소리.
노쇠해 버린 조각은 방역을 처리하던 중 예상치 못한 일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정신을 잃기 전 겨우 병원에 도착해 기절한다. 깨어나 보니 그녀를 치료한 건, 이 병원에 페이 닥터로 있는 강 박사였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을까 봐 당황하는 그녀.
강 박사는 무심하게 서로의 비밀을 덮어주기로 제안한다. 강 박사를 처리해야 할 수도 있다는 핑계를 애써 스스로에게 대면서 강 박사를 지켜보는 조각. 부유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그의 가족을 보며 조각은 이제껏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주제 자체가 밝지 않고, 폭력과 욕설, 살인이 난무하는 대사와 가사, 장면들이 주로 나오다 보니 관객들에게는 꽤 호불호가 갈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공연장에서 쉽게 보기 힘든 다양한 액션 씬들이 구현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액션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잘 맞추어져 있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작 초연이라는 한계를 감안할 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무대를 구역마다 나누어 회전시켜 사용하는 방법도 좋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각각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합과 시너지가 매력적인 공연이었다. 잘 정리하고 다듬어서 롱런하는 좋은 작품이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