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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블 May 14. 2020

나만의 장소

그 여름의 바다 


" 결혼적령기라는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 모아둔 돈이 없어도 기죽지 않을 ‘나’,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과 다른 모습인 것을 포용하는 ‘나’, 나이를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 ‘나’. 그런 내가 필요했다. "




그해 여름엔 종종 141번 버스를 타고 송정 바다로 향했다. 집에서 되도록 먼 장소가 필요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타지에서 친구 집에 함께 살고 있던 때였다. 그때 나에겐 온전한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그전부터 가족이 아닌 타인과 지내는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 또한 얕아서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로맨틱한 동경도, 이렇다 할 걱정도 없었다. 그저 나에겐 원룸을 구할 돈이 없었고, 친구에겐 함께 살 누군가가 필요했다.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던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고, 모아둔 돈이 없으니 누군가와 함께 살 기회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에 대책 없이 덤볐다. ‘10년이 넘게 알고 지낸 친한 친구’라는 것이 용기였다면 용기였다.      


친구에게는 보일 수 있는 모습만 선택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함께 사는 식구에게는 숨길 수 없는 모습이 쉽게 드러났다. 게으름, 예민함, 무신경함까지. 그 시절은 불안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타지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여유는 통장 잔액이 줄어들면서 함께 사라졌고, 친한 친구들의 결혼 소식, 30대로 접어든 나이, 이 모든 것은 나의 불안의 원천이었다.     


오래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지만 걱정과 슬픔을 나눌 수 없었다. 나는 혼자의 감정들을 풀어내는 방법을 몰랐고, 괜찮을 줄 알고 슬그머니 덮어버린 감정은 분출될 기회만을 엿보며 나를 매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결국 그 감정의 출구를 찾아 밖을 헤맸다. 여러 곳을 다녔지만, 그중에서 찾는 빈도수가 가장 높았던 곳은 송정 바다였다. 집을 나와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큰 마트 앞 건너편에서 141번 버스를 탔다. 30여 개 정도의 정거장을 지나쳐 송정해수욕장 입구에 내려 바다를 향해 걸어가곤 했다. 바다가 목적지였지만 바다를 가기 위해 스쳐 지나간 곳들도 나에겐 필요한 과정이었고, 그곳 또한 하나의 목적지였다.      


여름 바다로 향하던 길에 있던 민박집들은 소란스러웠고, 모래사장에는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떤 날은 맑았지만, 또 다른 날은 해무로 인해 100m 앞이 보이지 않던 날도 있었다. 바다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날 반겨주지 않았다. 나 또한 같은 불안의 무게로 찾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풀어지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했고, 내 삶에서 141번 버스는 조금씩 잊혀갔다. 

     

그때 바다는 나에게 유일한 쉼을 주는 온전한 장소였다. 타인과 있어도 홀로 있을 수 있던 곳이었다. 다양한 감정의 회오리에 갇힌 나도 결국 나였으며, 밀물과 썰물 그리고 해무가 있어도 바다는 결국 바다였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중심을 찾고 싶었다. 어떤 상황과 어떤 감정에서도 단단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나를 찾고 싶었다. 결혼적령기라는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 모아둔 돈이 없어도 기죽지 않을 ‘나’,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과 다른 모습인 것을 포용하는 ‘나’, 나이를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 ‘나’. 그런 내가 필요했다. 바다 앞에서는 그 어떤 나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는 모두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부산 생활은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지금은 그곳에서 멀리 떠나왔다. 내가 뿌려놓은 감정들은 여전히 그 바다의 부유물로 남아있을까. 부단히 찾았던 그해 여름 바다를 생각하면 성급히 뿌려놓은 감정이 생각나서 미안하고, 결국엔 고맙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한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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