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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

<사 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by 해헌 서재

<사 발> 신한균, 타니 아키라
---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강 일 송

오늘은 “사발”에 대한 책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예술 중 가장 연구하기가 좋고 그 시대를 잘 반영하는 것이
도자기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으며
대상이 되는 작품의 양이 월등합니다. 보관이 쉽고 오래가기도 하지요.

그 중 한반도 남부의 민요(민간 가마)에서 태어나 16-17세기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
다기를 제치고 일본의 국보와 보물이 된 명품 찻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꾸미지 않음의 미적 가치를 가진 우리의 옛 작품과 다도와의 관계, 한일간
더 나아가 유럽까지 영향을 미친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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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손기술이 뛰어났으며 지금도 미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생명공학, 반도체공학 등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몇백년 전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조선의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우리나라
도자그릇이 일본에서 명품 찻사발로 인정받으며, 많은 그릇이 국보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은 우리 조상이 빚은 그릇을 아직도 “막사발”이라고
부른다. 사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만든 그릇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일본인들이 어리석지도 않을뿐더러 실제 막사발도 아니었다.

당시의 최고 첨단 공산품이었던 백자는 중국, 조선, 베트남만이 만들 수 있었
고, 그 기술을 일본은 임진왜란때 수많은 장인들을 끌고 가 백자 기술을
확보한 후, 백자 기술이 없던 유럽에 도자기를 엄청나게 수출하여 선진국
진입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져간 사발을 명품 찻사발로 대접하며 차문화를 발전시켰다.

◉ 한국의 차문화
삼국시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이미 우리 조상은 차를 마셨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 이미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무성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는 차의 국가였다. 고려청자 중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이 다완, 즉
찻사발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일반 백성부터 왕까지 차생활이 일상생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을 뜻하는 다반사(茶飯事), 차로 제를
올리는 차례(茶禮), 차를 주관하는 관청인 다방(茶房) 등 차에 관한 말들이 이때
많이 생겨난다.

한반도에서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은 경상도 일부, 전라도 일부,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 국한된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곳의 백성들은 차를 중앙 정부에
납품하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차는 남도백성의 피라는 말까지 있었다.

가루차인 말차는 지배층이 주로 마셨고, 우려낸 엽차는 일반 백성이 주로 마셨
다고 추정된다. 14세기 말, 명을 세운 주원장은 차 생산지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차를 금하고 차소비량이 적은 반발효차인 엽차(우롱차)만을 마시라는
칙령을 내린다. 중국의 영향이 컸던 조선은 중국의 영향으로 말차는 서서히
사라지고 중엽부터 엽차를 주로 마시게 된다.

고려시대보다 차를 즐기는 풍속이 줄어든 조선에서는 제상에 차를 올리는 풍습
도 사라져 차 대신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후에는 산 속에
사는 승려와 재야의 일부 유학자들 외에는 차를 즐기지 않게 되었다.

◉ 일본에 간 명품 조선 찻사발
오래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찻사발 모두를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이라고
하나 그 대부분은 사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다. 즉 고려다완이란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만들어져 일본의 다도에 사용되는 명품
조선사발을 가르키는 용어인 것이다.

일본의 다도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반에 다도의 형태가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값비싼 천목다완류의 중국 찻사발의 사용이 줄어들고
급속히 한국산 찻사발, 즉 고려다완의 사용이 증가하였다. 그 배경에는
다도의 “와비 이념”이 있는데, 고적한 아취를 즐긴다는 와비 이념으로 차실은
점차 작아지고 양식과 예법은 간소해지고, 다도구 또한 값비싼 중국산에서
일본산과 한국산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다도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사발은 새롭게 주목을 받으며 수많은
차모임에 등장하게 된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에도시대로 접어든 일본
에서 조선사발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져갔다.

그러면 고려다완, 즉 명품 조선사발이 다완으로서 왜 훌륭한 가 짚고 넘어가보자.
당연하지만 고려다완은 찻사발로서 편의성을 갖춘 경우가 많다. 형태가 아주
자연스러우며 눈에 거슬리는 작위적인 것이 없다. 두 손으로 꽉 쥘 수 있는 크기
의 것이 많으며, 너무 벌어져 있거나 좁지도 않다. 입지름과 높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굽은 적당한 크기와 높이를 갖춘 게 대부분이다. 또 들었을 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손으로 잡기에 좋은” 경우가 많다.

◉ 일본의 국보 이도다완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명물 다완은 일본에서 키자에몽 이도
라고 불린다. 소장자인 키자에몽은 오사카에 살았던 죠닝 즉 상인이었다.
그 이후 이 키자에몽 이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병을 앓았고, 결국
인간이 가지기에는 워낙 위대한 명품이라며 1818년 쿄토의 코호앙 절에 기증
이 된다.

이도다완은 조선의 남부 민간 가마에서 만들어졌으며 정제되지 않은 흙으로 빚은
특징이 있다. 흔히 “이도의 약속”이라 하여 이도다완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1. 물레선이 강하게 나타난다.
2. 유약의 발색이 비파나무의 열매처럼 황색인 것
3. 유약의 유리질이 잘게 갈라져 생긴 빙렬이 있는 것
4. 굽이 높고 대나무 마디 모양의 죽절굽인 것
5. 굽 주위에 카이라기(유방울)이 있는 것
6. 굽바닥 중심에 팽이의 끝처럼 돌출된 토킹이 있는 것, 등이다.

이도다완은 제기(祭器)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경상남도 진주 부근의 가마에서
16세기 경에 생산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이도다완이 차회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1578년 10월 25일이다.

조선 초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상도의 진주목과 초계군에 황옹을 만드는 가마
가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때 말하는 황옹이 이도다완, 즉 황도사발일 가능성
이 높다. 옛 진주목에서만 이 황도사발 사금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명물인 츠츠이츠츠 이도가 있는데, 일본 전국 시대 때 지방의 다이묘
였던 츠츠이준케이는 조선에서 건너온 다완 한 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움을 받아 성을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 그는 성을
지키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이도다완을 히데요시에게 바쳤고 히데요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명품 이도다완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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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차(茶)와 조선 찻사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하지만, 지리산 주위에 야생차밭이 이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보이고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에서 “대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그 씨앗을 지리산 주변에 심어 그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고려 때 전성기를 맞고, 조선에 와서 쇠락합니다.
다반사, 차례 등의 말에서 암시되듯이 차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조선이후 소원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때부터 일본의
차문화는 융성해지는데, 거기에 결정적으로 조선의 찻사발이 기여를 합니다.

고온에서 자기를 굽는 기술은 중국, 조선, 베트남 정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
는데, 지금으로 치면 반도체 기술과도 맞먹는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은 찻사발을 조선에서 구입해서 쓰다가 임진왜란 이후
많은 민간 도공들을 납치해가서 일본에서 드디어 자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럽에 어머어마하게 수출을 함으로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요.
그 기술의 원산지인 한반도는 그 이후 전혀 그 첨단기술에 의한 득을 보지
못합니다.

키자에몽 이도를 위시한 조선의 찻사발은 한반도 남부에서 민간 도요에서 만들
어진 제기(祭器)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16-17세기 이후 더 이상 발견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한 성(城)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귀한 보물로
대접을 받습니다. 지금도 키자에몽 이도는 국보로서 일본의 다도하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한번 보기를 소원할 정도입니다.

많은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조사를 하여 대체로 경상남도 진주 일원이
그 이도다완의 고향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에서 운영하는 관요에서 나온 고급 질의 자기는 아니지만, 남부 민간요에서
만들어진 사발은 후대인이 볼 때 미적인 가치가 너무나 풍부합니다.
과도한 의도가 들어가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가 철철 넘칩니다.
같은 장인이, 같은 도요에서 만들어도 하나같이 크기와 질감과 모양이 다릅니다.
무의식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무의도의 무아지경에서 만든 사발들.

아무리 다시 현대에 와서 재현하려고 하여도 도대체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저도 경남 해안가 일원의 현대 도자기 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만들고 있는 민간
도요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체로 일본의 장인이 만든 사발보다는 그 재료인
도토가 같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영감이 비슷해서인지 훨씬 과거 사발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그 깊은 맛은 나타내지 못하더군요.

예술을 비롯해서 인간이 만드는 작품들은 이러한 명품찻사발에서 보이듯이
장인의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과 그 예술혼이 과도한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무아의 경지에서 몰입할 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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