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시장에 진입하려는 스타트업을 위한 전략의 고전
제프리 무어의 캐즘 마케팅을 읽었다. 스타트업, 특히 새로운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이 초기 얼리어답터 시장을 넘어서, 주류 시장으로 확장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 (‘캐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1991년도에 이 캐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출판된 책으로 (이후 1999년, 2002, 201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읽히는 초기 스타트업 전략 분야의 고전이다. 번역판 제목에는 ‘마케팅’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지만, 원제는 ‘캐즘 건너기 (Crossing the Chasm)’으로 사실 마케팅에 국한되는 책은 아니다. 말 그대로 ‘캐즘을 건너기’ 위한 주류 시장 진입 전략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세번째 읽었다. 제일 처음은 대학원생 때 내가 개발한 신기술 기반의 바이오벤처를 창업하겠다는 목표로 경영을 공부하기 위해서 읽었고 (유승삼 회장님의 번역본), 두번째는 헬스케어 투자사를 창업했던 직후에 읽었다. 이제는 40개 가까운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그들과 동고동락을 한 투자사 대표의 입장에서 읽었다. 이제는 많은 스타트업의 사례를 함께 경험한 덕분인지, 예전에 읽을 때는 공감이 잘 되지 않거나, 큰 감흥 없이 무심코 넘어갔던 구절이 이번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투자한 몇몇 스타트업이 겪었던 (겪고 있는)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지난 몇년 동안 내가 벤처 투자 시장에서 고민하면서 풀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그게 왜 풀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기도 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번 받았는데, 내 문제를 정의하고, 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팁을 얻었다. 이 책은 새로운 벤처 기업이 보수적인 시장으로 확장하기 위한 전략을 다루고 있으나, 그러한 전략은 (신생 기업에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개념으로 보수적인 집단을 설득해야 하는’ 여러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고전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이번에는 이 책을 트레바리 북클럽을 통해서 읽었다. 나는 클럽장으로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대표님 및 C-level 분들과 (각각) 트레바리 북클럽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 시즌 세번째 책으로 골라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 후술하겠지만, 이 책은 ‘모든’ 스타트업에 효과가 있는 책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이 두껍지는 않으나, 내용 자체가 쉽게 읽히는 내용은 아니다. 번역의 문제도 일부 있어서 이번에도 원서를 함께 읽었다. (이런 어려운 책의 번역은 비즈니스 백그라운드가 있는 번역자가 하면 좋겠다. 번역 과정에서 놓치는 디테일이나 뉘앙스들이 있다.)
하지만 대표님들 중에는 이 책에서 사업적인 인사이트를 많이 얻어가셨던 대표님들이 많았다. 특히, 현재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분석하고 (우리는 기술 수용 주기의 어디에 있는가), 해결책이나 앞으로 전략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셨던 것 같다.
이 책의 전반부에 다뤄지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기술 수용 주기(technology adoption cycle)과 캐즘이다. 새로운 기술(혹은 제품, 서비스 등)이 시장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불연속적이다. 즉, 시장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성향이 매우 다른 여러 세부적인 시장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선도 수용자 (혁신가, 매니아) - 조기 수용자 (선각자, 얼리어답터) - 초기 대중 (실용주의자) - 후기 대중 (보수주의자) - 말기 수용자 (회의주의자) 로 구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시장을 여러 특성에 맞춰서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각 시장을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혹은 기업들)로 구성되므로 각기 그에 맞는 다른 진입 전략을 써야 한다. 하나의 시장에서 통하던 진입 전략이, 그 다음 시장에서는 갑자기 통하지 않는다. 모든 스타트업이 TAM-SAM-SOM의 구분은 곧잘 하지만, 시장이 세부적으로 어떠한 다른 특성이 있는 하부 시장으로 구성되는지 파악하고, 각 시장에 맞는 차별화된 진입 전략을 체계적으로 쓰는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물다.
더 중요한 것은 캐즘의 개념이다. 기술수용주기의 각 시장 사이에는 약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특히나 초기 시장 (선도 수용자, 조기 수용자)에서 주류 시장 (초기 대중, 후기 대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것을 캐즘이라 부른다. 조기 수용자 (얼리어답터) 시장과 초기 대중 (실용주의자) 시장은 너무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얼리어답터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던 스타트업이 그 이후 주류 시장으로 확장하는데는 큰 어려움을 겪고 그 단계에서 실패하기도 한다.
사실 기술 수용 주기에 따른 시장의 구분은 책에 매우 상세하고 길게 설명되어 있다. 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초기 시장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리스크를 감수하며, 불완전한 제품에도 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어떤 경우, 오히려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그 기술을 쓰지 않아도, 여러 경쟁 업체 중에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도,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쓰는 구매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주류 시장은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기본 제품 뿐만 아니라 이를 보강할 수 있는 주변 제품/환경 ('완비 제품')이 갖춰져야만하며, 주변에 이미 여러 사람이 사용하고 있어서 참고할만한 사례가 많고, 여러 경쟁 업체를 비교하여 그 중에 하나를 고르려고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다른 성향의 고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초기 시장에서 통하던 전략이 주류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캐즘을 넘기 위해서 책에서는 적군이 장악하고 있는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하여 침투에 성공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여 소위 ‘D-Day 전략’을 제시한다. 이런 전략의 시작은 결국 마켓 세그먼테이션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만큼 작고 구체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규모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장점을 잘 어필할 수 있는 특정 세그먼트의 시장을 선택하고, 모든 리소스를 동원하여 일단 이 교두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다. 즉,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가 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이 말처럼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시장을 어떻게 세그멘테이션할지, 그 중에 어떤 세그먼트에 집중할지, 이를 어떻게 공략할지 하나하나가 관건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시간, 돈, 인력이 제한적이므로 캐즘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 하나’의 세그먼트 (두 개 이상은 절대 안 된다)를 골라서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시장을 고르기 위한 여러 방법과 사례들이 책에는 설명되고 있다.
이런 ‘D-Day’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서 강조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 ‘완비제품 (whole product)’이다. 완비제품은 우리 제품(일반 제품)의 가치를 높여주고,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강화해주는 주변 제품이나 환경, 교육, 표준 등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태블릿 PC는 와이파이 네트워크가 함께 구비되어야만, 새로운 소프트웨어에는 사용 방법에 대한 교육, 자동 업데이트 기능이 있어야만, EMR은 표준에 맞아야만 그 가치가 높아진다. 초기 시장은 이런 보강 제품/환경/서비스 없이도 구매하지만, 주류 시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세부적인 마켓 세그먼트마다 요구하는 완비제품의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켓 세그먼트가 달라지만 우리 제품(일반 제품)에 더하는 완비제품의 구성을 완전히 다르게 해야 하므로, 엄청난 리소스가 들어간다. 스타트업은 리소스를 이렇게 분산시킬 수 있는 재정적, 시간적 여력이 없으므로 무조건 하나의 마켓에 집중하여 완비제품으로 공략하고, 이후에 인접한 다른 시장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써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책에는 포지셔닝, 유통 채널, 프라이싱 등 캐즘을 넘기 위한 전략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책을 읽고 대표님들, C-level 분들과 토론해보았을 때 많은 인사이트와 고민해볼 지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이 책이 모든 스타트업에 적용 가능한 전략을 다루느냐 하는 이슈가 있다. 책에서는 주로 새로운 기술 기반의 제품을 내어놓은 B2B 시장에서의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기술 기반의 사업이 아닌, B2C 시장을 공략하는 스타트업도 이 책의 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갈렸다. (실제로 B2C 서비스를 하시는 대표님들은 오히려 본인들에게 더 맞는 전략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셨다.)
더 나아가면, 1990년대에 나온 스타트업 전략에 대한 책이 (1999년, 2002, 201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지금의 스타트업 사업 전략에도 적용 가능하냐에 대한 이슈가 있다. 최근에는 (특히 앱, 소프트웨어 기반의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시장 세그먼트를 고르고, 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방식과 리소스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과거와 달리 린스타트업, 그로스해킹 등의 여러 기법을 통해서 비용 효과적으로 민첩하게 다양한 시도를 하고, 빠르게 실패하면서 PMF를 찾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러 시나리오를 통해서 하나의 시장만을 고르고, 이 하나의 시장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결사적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D-Day 전략만이 유효할까? 아니면 가볍고 빠른, 여러번의 실험을 통해서 치고 빠지면서 적합한 시장을 고르는 마치 게릴라 전략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결국 교두보 시장을 마련한 이후에 주류 시장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많은 스타트업들이 실험에 기반하여 시장에서 PMF를 찾아가는 전략을 쓰기 때문인지, 토론을 했을 때 의외로 많은 대표님들이 ‘우리가 현재 어느 마켓 세그먼트에 집중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시기도 했다. 혹은 집중하고 있는 마켓 세그먼트가 있는 경우에도 그것이 (책에서 설명된만큼)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거나, 체계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었다. (책의 내용을 적용하자면) D-Day 전략이나, 완비제품 등은 모두 명확한 마켓 세그먼트를 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런 부분은 대표님들의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캐즘의 개념에 대해서도 현재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반론도 있다. 현재는 유튜브, SNS 등의 발달로 매니아/선각자로 구성된 초기 시장의 구성원들이 예전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니아/선각자들이 이런 유튜브, SNS 등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며, 그런 과정에서 주류 시장에도 이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더 커졌다. 과거에는 초기 시장의 구성원은 서로 연결되지도 않으며, 주류 시장의 구성원과 초기 시장의 구성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참고하는 정보도 달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 상황이라면 캐즘은 예전보다 더 뛰어넘기가 쉬운 시장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아무리 그래도 결국 초기 시장과 주류 시장을 구성하는 구매자들의 성향 자체는 여전히 변함 없기 때문에 대세에는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관통하고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온 고전은 깊은 인사이트를 준다. 신기술 스타트업 전략 분야의 고전인 ‘캐즘 마케팅’은 포함된 사례나 기술 수준 등이 이제는 조금 올드해졌지만, 여전히 현직에 있는 스타트업 대표들과 구성원 들에게 많은 인사이트와 프레임워크, 해결책을 제공한다. 실제로 이번 북클럽에 참여한 여러 대표님, 이사님들이 회사로 돌아가 이 책을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읽으면서 (어떤 분들은 이미 구성원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더 고민을 해보겠다고 하셨다.
이 책은 신생 기업이 주류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기승전결이 딱 떨어지는 총합적인 전략을 다룬다. 기술수용주기에 따른 각 시장의 구분과, 구성원들의 특징, 마켓 세그멘테이션의 중요성, D-Day 전략, 완비제품의 개념과 특성, 포지셔닝 등등. 이 총합적인 전략 전체를 우리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전략을 세부적으로 구성하는 개념, 프레임워크, 세부 전략 들은 시대나 사업 모델에 상관 없이 중요한 인사이트를 준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시간을 두고서 이 책을 또 읽게 될텐데, 그때는 이 고전이 나에게 또 어떤 인사이트를 줄 것인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