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관한 긴듯 짧은 글들]
내 인생에는
'이룩했다'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아마도 유퀴즈에 올림픽 메달 선수나
큰 성취를 이룬 유명인들이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난 뒤이거나
유튜브에 '알파메일'이니 '영 앤 리치'니
'월 1000만 원'이니 하는 썸내일을
지나친 후인지도 모른다.
(40대 남성에게 인기 주제인 거 같다.)
아니면 뉴스에서 누구 연예인이
'몇십억 아파트'로 이사 갔다거나
'몇십억 건물'을 샀다거나
하는 이야기였을지도.
이야기를 들은 직후가 아니더라도
한참뒤에 그 잔상이 지연도착 한다.
그 잔상의 그림자들은
내 인생을 쿡쿡 찌르며
'넌 여태 뭐 했냐?'라며
자기 주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찔러놓고 가기도 한다.
숫자로 증명된 그들의 부와 명예 앞에
내 인생은 가차 없이 밟히고 채이되
전혀 의식되지 않는,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낙엽 한 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들의 인생은
조명받는다.
대중과 알고리즘이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빛을 비춘다.
요즘에는 조회수와 좋아요라는
숫자가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정확하게 나타내준다.
그렇게 빛나는 상태로
'기록되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서
멋들어진 기획과 영상으로
그들의 인생을 기록해 준다.
하지만 낙엽에게도
인생이 있다.
일기는 낙엽 한 장 한 장의
이야기이다.
어느 나무에 붙어있다가
어떻게 떨어져서 어디를
여행했으며
몇 명의 발에 차였으며
밟혔으며 또 때로는
기분 좋게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는지
일기는 모두 기록한다.
누가 대신 써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좋다.
아니, 대신 써주면 안 된다.
내가 직접 쓸 때
세상의 그 어느 기록보다도
훨씬 더 솔직하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조명은 못 받지만
내가 만든 조명을
내 마음대로 비출 수 있다.
애초에 누구 보라고
누구에게 팔려고
누구에게 들리게 하려고
남기는 기록이 아니다.
낙엽 한 장이 이룩한 것이
있을까 싶다면
일기를 펼쳐보면 된다.
생존했고 동료 낙엽을
거들었고 동료 낙엽의
부축을 받았고
가족을 이뤄 함께
날았고 함께 이겨냈고
함께 좌절했던 것을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어떤 기록보다도
더 자세하게 말이다.
이룩한 것이 없어도
쓰는 일기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룩한 것은
다 쓰기 힘들 정도로 많다.
다 쓰지 못하고
골라야 할 정도로 말이다.
일기를 써보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