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빠와 새 자매
“장난 적당히 치라, 둘 다. 그라다 진짜 다친다.”
장난과 괴롭힘은 의도와 결과가 다르다. 장난은 순간의 웃음으로 끝나지만, 괴롭힘은 상대에게 쉬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정말일까? 그때 새엄마의 눈에는 친 아들의 행동이 정말 정말 순진무구한 장난으로만 비쳤을까?
젖멍울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친 날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팔뚝을 꼬집고 비틀어서 시퍼렇게 멍이 든 날은 자다가 몸을 뒤척이기만 해도 아파서 깨어났다. 병진은 주연이 앉아 있으면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고 누워 있으면 배를 발로 찼다. 이걸 다 보고도 정말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까?
간혹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지 엄마 닮아서 사사건건 불만이제?”라고 하거나 “원래 머스마들은 그란다.” 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제. 니도 니 엄마 따라 갈끼면 얼른 가삐라, 안 잡는데이.”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콩알만 한 심장이 쿵, 떨어졌다.
통영군과 통합된 충무시가 통영시로 행정 명칭이 바뀌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주연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진섭이 바다로 나가 날밤을 새우고 번 돈과 순옥이 화장품을 팔고 남은 돈에 은행 대출을 얹어 운하맨션 24평짜리 아파트를 매수했다.
주방과 붙은 거실. 큰방과 마주 보는 작은방. 작은방은 마땅히 병진의 차지였고, 작은방보다 대각선으로 세 걸음 더 너른 큰방은 순옥과 주연이 함께 사용했다. 진섭이 귀가하면 주연은 소파도 놓을 수 없는 어지럽고 비좁은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작은 몸을 뉘었다. 혼자서 자는 게 익숙지 않았지만, 진섭이 육지에서 지내는 기간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친엄마 박차영이 사라진 날보다 더욱 심각한 사건이 발생한 건 인평중학교에 입학한 주연이 첫 중간고사를 치른 날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진섭이 타고 나갔던 배가 다른 어선과 충돌하여 침몰했단 사실을 해경에게 전해 들은 순옥의 낯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순옥은 만날 하던 꽃단장도 잊은 채 짝짝이 구두를 신고서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사고 현장과 가까운 부두에는 이미 해경과 119 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리고 이곳저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마이크를 쥔 어른도 있었고 메가폰을 든 어른도 있었다. 정복을 걸친 해경이 실종자 명단과 사망자 명단을 공개했다. 심진섭의 이름 석 자는 사망자 명단 최상단에 흘겨 쓰여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진 순옥은 가슴을 뜯으며 울부짖었다. 주연도 순옥의 등을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일 년에 한두 번 돌아와 매정한 눈길로 저를 쳐다보던 아빠가 죽은 사실보다 남편을 잃은 순옥이 저를 두고 부산으로 돌아갈까 싶어서, 그래서 주연은 울었다.
“엄마…. 내 버리지 마라…. 흐아앙.”
다행히도 순옥은 의붓딸을 보육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순옥은 친가도 없고 외가도 없는 주연을 끼고 살았다. 주연은 새엄마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아빠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더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순옥을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고,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혼자서도 열심히 했다. 병진이 11번을 틀라고 하면 군말 없이 달려가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기분을 잡쳤다고 머리카락을 훅 잡아당겨도 그러려니 했다. 예전처럼 새엄마에게 달려가 오빠가 괴롭혔다고 고자질하면 병진은 이렇게 협박하곤 했다.
“갖다 버릴 끼다, 니.”
그래서 지렁이 꿈틀하는 미약한 반항조차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초상을 치르고 중학교 1학년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무난하게 지냈다. 순옥은 은행 대출금을 갚느라 월화수목금토일 일했고, 병진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학교가 끝나면 저녁 6시부터 밤 10까지 입시학원에서 영어·수학·국어·과학 종합반을 들었다. 주연은 학원에 보내달라고 일절 보채지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인 순옥에게 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에.
주연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청소와 빨래를 했다. 계란프라이 말고는 할 수 있는 반찬이 없지만 전기밥솥에 씻은 쌀을 넣고 스위치를 켤 줄은 알았다. 하루라도 거르면 티가 나는 집안일을 꼼꼼하게 해치운 주연은 거실 바닥에 작은 밥상을 펴 놓고 공부했다. 순옥의 장사 밑천이 든 화장품 상자에 구부정한 등을 기대고 새엄마와 오빠가 귀가할 때까지 교과서에 알록달록 밑줄을 그었다.
어차피 아빠는 일 년에 적게는 두어 번 많게는 서너 번 귀가했었다. 진섭의 영원한 부재는 주연의 일상을 크게 흔들어 놓지도 못했다. 한데,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되고 원치 않은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주연이 가슴 속 깊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던 여러 가지 변화 중 하나였다.
“병진아, 주연아, 아저씨한테 인사드려라.”
순옥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아들딸 손을 잡고 일요일 아침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주말마다 이 짓을 했던 이유를 병진과 주연에게 밝혔다. 주연은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여전히 헷갈렸다. 순옥은 첫영성체도 받지 않고 미사포를 머리에 썼다가 수녀님께 주의를 받았다. 병진은 신부님의 말씀 전례를 듣는 내내 다리를 덜덜덜 떨었고,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1분에 한 번씩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리며 지루한 티를 팍팍 냈다.
“찬미 예수님. 병진아, 주연아. 자매님께서 니들 얘기 많이 해주시더구나. 반갑다.”
아저씨는 베드로라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는 주연과 동갑인 외동딸이 있었다.
“은영아, 은영아, 아야, 최은영. 이리 온나. 서로 인사 좀 해라.”
주연은 최은영과 안면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라서가 아니다. 둘은 1학년도 2학년도 다른 반이었다. 다만, 최은영이 1학년 3반에 있을 때 몰려다니던 세 명의 베프가 주연과 같은 2학년 7반으로 진급하였고, 혼자 2학년 1반으로 배정받은 최은영이 학기 초 내내 7반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들락날락했던 터라 그래서 반 친구만큼이나 익숙한 낯이었다.
주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알은체했다. “안녕.”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최은영은 주연의 인사를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곤 무심하게 서 있는 병진에게만 살갑게 인사했다. “안녕.”
성당에서의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옥과 베드로는 혼배성사를 올리고 살림을 합쳤다. 새 가정을 꾸린 곳은 진섭과 순옥의 명의로 장만했던 그 운하맨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