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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필피 Sep 07. 2024

김해준(2)

가세요, 꺼지세요

뚝뚝, 시뻘건 피가 흘러 그대로 고드름과 함께 꽁꽁 얼어버리는 그런 느낌. 한마디로 고요하고 차다.


반면 어머니는 목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남편을 살려내라고 개새끼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망치로 바위를 깨부수듯 가슴을 내리치며 통곡했다. 바닥으로 허물어지며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귀가한 날에 들려주던 이야기를 권혜자도 듣고 해준도 다 들었다. 권혜자가 쏟아내는 속사정에 상갓집은 술렁였고, 험악해지는 유가족의 표정을 읽은 개새끼는 생사람 잡지 말라며 난색 했다.


“사람을 모함해도 유분수지, 김 대리 말만 듣고 이럽니까? 가는 길에 편해지라고 애도라도 표하려고 바쁜 걸음 했더니, 나 원 참. 이거 놓으시오, 부인. 가겠소. 꺼지면 되잖소!”


개새끼는 주신(酒神)을 모셨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부서 회식 자리를 찬양했고, 회식이 끝나면 2차로 가는 노래방을 두 팔 벌려 칭송했다. 2차에서 만족하지 못한 개새끼는 3차를 외쳤으며, 3차는 보통 자정을 넘은 시각 애꿎은 부하직원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당시에는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았다. 하지만 해준의 집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핵가족, 달랑 세 식구였다. 권혜자의 요리는 맛깔났으며, 그녀의 외모는 꺾고 싶은 꽃처럼 생겼으며, 상사의 명령에 거절하는 법이 없었던 해준의 부친 김순돌은 이름만큼이나 순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매번 3차로 당첨된 부하직원의 집은 김순돌의 아파트였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은 네발로 기는 짐승이 된다. 자다가 깬 해준이 제 방을 나와 다소 소란스러운 거실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젊은 아저씨들은 술에 취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아저씨는 와이셔츠를 끌러 불룩한 뱃살을 자랑하고, 또 어떤 아저씨는 넥타이를 이마에 맨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모두가 잠이든 한밤중에 피어난 작은 소란은 어머니와 개새끼의 소리였다. 해준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욕실 불을 켰다. 깜깜했던 작은 거실에 빛이 닿았다. 어머니는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며, 어머니를 짓누르고 있는 그 무언가는 아버지가 술을 따르며 ‘부장님’이라고 부르던 늙은 그 아저씨였다.


“아…?”


일곱 살이던 해준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이 아니었다. 어린 해준이 알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의 사실은 부장이라는 새끼가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다는 거였다. 해준의 망막에 맺힌 어머니의 낯이 삽시에 삶은 가재처럼 붉어졌다. 벌떡 일어난 부장 새끼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더니 남의 안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다 경찰한테 딱 걸린 절도범처럼 줄행랑쳤다.


새벽 3시였다. 권혜자는 울면서 아들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못 본 걸로 하자.” 속삭이는 음성은 겁에 질려 있었고, 눈빛은 수치심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줘.”


권혜자는 몸을 추스르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아침이 되어도 방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3차를 위해 김순돌 대리의 집이 이용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술에 취한 김순돌이 퇴근하면 늘어놓는 이야기가 권혜자와 김해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김순돌은 회사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맥락 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로운 이야기의 파편을 그러모아 보면 부장 새끼가 아버지를 지독히도 못살게 굴고 있었다. 부하직원들을 대동해 아주 조직적으로. 들어보면 마치 아버지가 회사를 자발적으로 관둘 때까지 끝까지 몰아붙일 작정인가 보았다. 한 번 입사하면 평생직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가, 아버지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선택지를 아예 고려조차 할 수 없게끔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 같다.


폭언과 폭행. 멸시와 냉대. 이름처럼 순한 김순돌은 나날이 말라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체한 등을 쓸어내리며 회사를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이 나이에 대체 어디에 가서 새출발하란 말이냐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여수나 당신의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자고 강력하게 제안했다. 아버지는 푹 꺼진 바닥을 응시하며 조금만 더 버텨보겠다고 중얼거렸다.


버티고 버티던 김순돌은 회사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어렸던 해준은 정신이 혼미했다. 멍했다.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헤아릴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다만, 소년의 속에 의문의 싹이 텄다. 아버지는 왜 자살했을까? 나쁜 사람은 개새낀데. 화가 나고 억울해서 무언가에 분풀이해야 했다면 그 무언가는 당신이 아니라 그 개새끼여야 하는데. 아버지는 왜 멍청하고 바보 같은 선택을 자행했을까? 13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는 대신 불행의 원흉인 개새끼를 저세상으로 확 밀어버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왜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을까? 나와 어머니가 받을 상처는? 계산에 넣지도 않은 건가? 정말?


술고래 개새끼는 장례식장에서 공짜 술을 들이부을 계획이었던 건지 차를 몰고 오지 않았다. 쫓겨나듯 계단을 올라 병원을 나선 개새끼는 함께 온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버스나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홀로 씩씩거리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난장판이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슬그머니 빠져나온 해준은 개새끼를 뒤쫓았다. 늦은 저녁 인파가 몰리는 시간대였다. 개새끼는 열차가 진입하는 입구에 서 있었다.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해준은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길….’하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곧이어 기다렸던 안내방송이 흘렀다. 해준은 개새끼에게 다가가 “아저씨, 아저씨.”하고 그의 까만 정장을 끌어당겼다. 개새끼가 돌아봤다. 해준을 알아본 개새끼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인자한 어른처럼 “어? 해준이구나.”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고, 해준은 아저씨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귀를 잠시 빌려달라고 손짓했다. 개새끼는 선뜻 뒤돌아 허리를 숙였다. 캄캄한 어둠 속을 비집고 환한 빛이 발하는 그 순간 해준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가세요. 꺼지세요.”


그러곤 개새끼를 철로 위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먼 곳을 응시하며 잠시간 그날을 곱씹던 해준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두꺼운 안경알 위로 서서히 초점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날의 제 실수는 저의 무의식이 세상 밖으로 나온 건가요? 그러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수도 있겠네요.”

“어떤 무의식을 말하는 거니?”

“그야 저도 모르죠. 무의식이란 의식할 수 없는 욕망과 억압을 의미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무의식이라는 건데…. 제가 무의식을 의식할 수 있으면 그게 무의식이겠어요?”


검지 끝으로 안경 브릿지를 스윽 추켜올린 의사는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겨 꽂으며 차분하게 답했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는 하나의 이론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거든. 게다가 프로이트의 이론은 실험으로 증명된 게 몇 가지 없어. 인간의 행동은 그리 단순하지 않단다.”

“….”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니?”


그럴 리가…. 죄책감 따위는 없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했을 뿐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비참한 죽음은 비참한 죽음으로.


오히려 만족스러운 복수가 아니어서 유감이었다. 가해자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자기 잘못을 반성할 틈도 없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놀라는 순간 그리고 사망이 임박한 순간. 딱 그 두 감정만 느꼈겠지. 천천히 아주 느리게 화마에 휩싸여 죽었어야 했는데….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나서 사무치도록 아쉬웠다. 해준이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바로 그 점이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막심한 후회였다.


“준아,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 그날의 사고는 순전히 실수였어.”

“예,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생님.”


의사는 해준의 심리를 얼마나 깊게 들여다보았을까.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하고 파악했을까. 해준은 선생이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왜냐면 30분의 일대일 내담을 끝내기 전 항상 덧대는 코멘트가 있어서였다.


“다음에 또 그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으면 밤이고 새벽이고 나한테 꼭 연락해야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디선가 배우지 않아도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도덕이며 규범이며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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