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일기 #4
인간사 일과 번뇌는 언제나 차고 넘쳐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먹고살기 위해서 반드시 하루에 할당된 과업과 고민을 채워야만 한다. 허겁지겁 오늘의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앉아서 일을 하다가 문득 사방이 고요해졌음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면 꼭 시끄럽던 달리가 어디엔가 퍼져서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야 자냐? 자네.... 아이고 달리야! 나는 이 녀석아 너 츄르 한 개 참치캔 한 통 더 사주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너는 은혜라도 갚는 척 쥐라도 잡아서 선물로 바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삶을 위해 번뇌에 너무 사로잡히다 보면 삶의 목적이 희미해져 갈 때가 있다. 다급하게 살아가다가 잠시 쉬기 위해 고개를 들면, 머릿속은 온갖 종류의 모호함, 불확실함, 위기감, 무기력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나는 곧 생각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삶의 목적? 당연히 행복이죠. 아니, 행복을 위해 사는데 이러고 벅차게 살아야 하나요? 그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죠. 그 미래는 대체 언제인가요? 애초에 행복이라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삶에 목적이라는 것이 있는지, 아니면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고 이왕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복잡하고 답이 없는 문제들과 농도 짙은 무기력함이 나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있을 바로 그때 뒤를 돌아보면...
ㅋㅋ 달리야! 너는 천하태평이구나! 너는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니? 너도 곧 있으면 정년퇴직당한 후에 치킨을 튀기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별 생각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구나? 하기사, 너는 그 귀여움을 어필해서 어떻게든 빌어먹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아이컨택하면서 애옹 울기만 하면 너에게 츄르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말이야. 하여튼 너에게도 '경축!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함' 플래카드라도 하나 만들어 목에 걸어주면 딱 알맞을 것 같다. 보통 많이 자는 고양이는 하루에 스무 시간 정도 잔다고 하는데, 너도 딱 그 정도 자는 것 같구나. 캣타워, 소파, 침대 위, 침대 밑, 컴퓨터 위, 신발장, 피아노 위, 버리려고 내놓은 상자, 어느 한 곳 너의 침대가 아닌 곳을 본 적이 없구나. 그렇게 졸린가?
나는 이미 저런 류의 무기력한 고민에 대해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답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저 그 생각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데, 밀물처럼 몰려드는 생각으로 인해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는 급박한 상황에 우리의 달리는 그냥 쳐 자빠져 자는 것만으로 훌륭히 그 일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달리의 저 얼빠진 표정을 더 잘 보려면 열심히 과업 할당량을 채워야 하니, 넋 놓고 있지 말고 열심히 다시 일이나 하련다. 켁! 이게 바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는 과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