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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rene Jul 31. 2019

난 세 가지 명함을 갖고 다닌다

프리랜서의 일상생활. 16

내 지갑, 혹은 지갑 역할을 하는 파우치 안에는 세 가지 명함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명함을 촬영해서 보관하는 앱이 한 사람당 한 개 이상의 명함을 만들거나 아이디를 여러 개 만들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는 아이디를 여러 개 만들 수 없다 보니 나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상대를 어디에서 만났느냐에 따라 저장하기가 애매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케팅 업무로 만난 사람이 해당 앱에서 내 명함을 등록했다고 알림이 오면, 내 박사 명함이 해당 앱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명함을 연결하기가 애매해지더라.


명함을 세 가지 갖고 다닌다고 하면 누군가는 '대단하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내가 명함을 세 가지 갖고 다니는 것은 어느 종류의 명함을 누군가에게 주면, 나의 다른 명함에 새겨진 직책과 그 맥락에서 하는 일은 숨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내 존재 자체로 상대가 나를 인정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면 명함을 하나만 들고 다닐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명함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내가 그 일로 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있지만 내가 아직 어느 직역에서도 완전히 자리를 잡지는 못했단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 직역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면 그 일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일로 생계가 해결되고 나의 시간이 채워진다면 내가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넘어서 할 수가 없게 될 테니까. 그래서 세 가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사실 멋있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제 30대 후반에 내가 프리랜서로 한 영역에만 집중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을 정도로 자리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명함이 보여주는 내 현재의 불안정성이 그렇게 유쾌하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아직 우리나라에선 한 사람이 다양한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고,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한 시점에는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내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을 세 가지 정도 한다고 하면 나와 일하는 상대는 함께 하는 일에 대한 나의 능력에 물음표를 갖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 내가 여러 가지 일로 계약을 맺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되어도 상대에겐 내가 상대와 관련된 일만 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세 가지 명함을 가지고, 세 가지 명함을 가져야만 할 정도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그 일들의 성격이 너무 다르고, 각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너무 다양해서 그 업무와 사람에 적응하는데 항상 에너지가 많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일을 할 때는 그 일 모드로 나 자신을 항상 스위치 해야 하고, 그렇게 스위치 하는 과정에서는 때때로 '난 대체 뭘 하는 사람인 거야?'라는 의문이 들더라. 그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즐겁거나 쉽지만은 않다.


물론 이는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사실 나의 경우, 학부시절에 중간고사를 보는 과목이 하나만 있으면 그 시험을 망치는 반면 6과목에서 시험을 보면 그 시험들을 잘 보는 이상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과목 공부를 하다 질리면 다른 과목 공부를 해서 그 질림을 해소했고, 마찬가지로 지금은 한 종류의 일을 하다 질리면 다른 종류의 일을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 세 가지 명함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나의 성향의 영향이 크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 가지 명함을 갖고 사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다.


n 잡러. 어찌 보면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사람이 하나의 일로 본인이 만족할 수준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면 n 잡러로 살지 않고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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