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cyrene Mar 13. 2020

n 잡러의 허와 실

프리 하지 않은 프리랜서 이야기. 9화

작년에 내가 계약을 체결하고 일을 한 나의 고마운 '갑님'들은 다양했다. 벤처캐피털, 드라마 제작사, 정부, 정부 출연 연구기관, 마케팅 대행사. 내가 했던 일들도 다 달랐다. 연구 및 보고서 작성, 영문 검토 및 번역, 기업 블로그 콘텐츠 작성. 단순 노동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었고 분명 내가 필요해서 나한테 연락이 와서 하게 된 일들이다. n 잡러라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작년 언젠가 문득 들었다. 그냥 프리랜서가 아니라.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혹자는 '와~ 다양한 능력을 가졌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압도적인 능력을 갖춘 영역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약 어느 분야에 대해서 압도적인 능력을 가졌다면, 난 굳이 n 잡러의 삶을 살지 않고 그 압도적인 능력이 십분 발휘되는 영역에서 그 일만 받아서 하기에도 버거웠을 테니까.


이러한 n 잡러 가 갖는 한계는 한 종류의 일을 할 때 '단가'가 낮단 것이다. 아무래도 정말 압도적인 배경과 능력을 가진 사람을 쓰고는 싶지만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에는 비싸고, 이 정도 사람한테 맡기면 본인들이 필요한 수준의 결과물을 받을 수는 있을 것으로 예상될 때 '갑님'들은 n 잡러로 살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긴다. 그렇다 보니 n 잡러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받는 일의 단가는 전반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n 잡러들은 죽어라 하고 일을 해야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최소한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n 잡러로 사는 삶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게 한 가지 있다. 그건 n 잡러는 어느 영역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추기가 힘들 수 있단 사실이다. 누구나 그렇듯 특정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고 그 업계에서 몸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업계에 관련된 경력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야 한다. 사람들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사람들과 기업들은 일관성 없는 이력서랑 업무경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정규직을 채용할 때도 그렇지만 프리랜서를 쓸 때는 당연히 더 그렇다. 그런데 n 잡러들은 여러 종류의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다 보니 특정 영역에 경력이 집중적으로 쌓일 수가 없다. 


물론, 한 영역에 집중해서 돈이 안되더라도 그 영역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실력과 능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n 잡러의 삶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써 지금 그런 작업을 하다가는 지금 당장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패기로라도 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 주위에 있는 30대 중후반 이상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제 가난한 건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라고 말하며 n 잡러의 삶을 살아간다. 최근에도 학계에서 꾸준히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내 지인은 학위논문을 쓰는데 방해가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로 파트타임 일을 함과 동시에 지방대 강사로도 나가기로 했다. 현재와 현실의 무게는 그토록 무겁다. 그래서 '하나에 집중해! 왜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니!'라는 말을 들으면 n 잡러는 화가 난다. 


n 잡러는 그래서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현실도 챙겨야 하고, 뭐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주어진 것들에 항상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실력, 능력과 경력이 쌓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수도 없이 혼란스러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주위에서는 '그래서 넌 뭐가 하고 싶은 건데?'라고 물어보고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라며 조언하고 그러면 '내가 이걸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걸까?'라는 회의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 감정 소모를 이겨내고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으며, 착각이라 해도 그렇게 믿으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n 잡러의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n 잡러의 삶이 고통과 허무함으로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다재다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단순노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n 잡러는 본인이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는 상호 간에 연관이 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어느 정도 이상의 난이도가 있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을 프리랜서로 계약하고 하는 건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게 다른 성격의 일을 받을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n 잡러라 하더라도 그 일들의 공통영역을 묶으면 서로 다른 그 일들을 하는 게 어느 정도는 시너지를 내고 장기적으로는 그 다른 그림들이 하나로 묶이는 지점이 발생할 수 있다.


내 경우에 그건 [글과 언어]였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글과 언어가 바탕이 된 것들이었고, 1년 넘게 고민을 하다 올해 초에 내가 유튜브 채널을 열게 된 것도 영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기초는 글로 이뤄지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한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매체가 달랐을 뿐, 하나의 매체에 사용한 글 재료를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서 다른 매체에 재가공하는 것도 가능하겠더라. 


만약 다양한 일을 n 잡러로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만 보며 액셀을 밟을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 간에 시너지를 내고 그걸 하나로 엮거나 자신과 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내가 의식하거나 의도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내게 돈을 주면서 맡길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그건 내게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재능이나 능력은 있단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그런 능력들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어떤 형태로 구축해야 그 모든 영역에 경력, 능력과 실력은 물론이고 관계까지 형성되어서 장기적으로는 프리랜서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프리랜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유로움 아닌가? 그 자유로움의 끝에는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시스템을 통해 내 생계가 해결되는 삶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n 잡러로 사는 시간들은 그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현실화된다면, 지금의 힘듦과 혼란은 투자비용이 되고 허공에 뿌린 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랜서의 허와 실 2 ('허'편)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