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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rene Mar 24. 2020

괴물 2

N번방과 같은 텔레그램 사태는 왜 일어났을까?

(글이 너무 길어서 의사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글을 두 개로 쪼갰습니다.)


괴물이 만들어지는 이유

그런 괴물들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고, 그 결정들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그런 괴물들을 처벌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방 효과가 있으니까. 그런데 성매매업 규제를 강화할수록 업소들이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 들어서 오피스텔과 같이 더 가까운 곳으로 장소를 옮겼듯이 규제와 처벌만으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규제와 처벌이 강화될수록 그에 대한 매개체가 매체들은 더 결속력을 강화하고 더 철저하게 걸리지 않을 은밀한 곳으로 숨어 들어갈 것이다.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아쉬운 것은 항상 [처벌]에 초점이 맞춰지고 프레임이 [남자 vs. 여자]로 잡힌다는데 있다. 처벌은 기본적으로 되어야 하지만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크고 근본적인 우리 사회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대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는,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분노하고, 손가락질하면서 우리 사회에 갈등만 심화시키다 흐지부지 되다가 이 문제에 집중하는 소수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잊히고 만다.


그런 괴물들이 만들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네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 두 번째는 특정한 '남성성'의 강요, 세 번째는 남녀 간의 다름에 대한 소통의 부재, 네 번째는 성적인 부분에 대한 과도한 억압과 그에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극단적인 개방성이다.


첫 번째,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

괴물들이 만들어지는 원인 중 하나로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을 꼽은 것은, 남자들의 성적인 욕구는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강하게 올라오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갖는 것이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을 억누를수록 그 욕구가 더 이상한 방향으로 변형된다. 고시촌에 성매매업소들이 성행하고 곳곳에 있는 것도 그 영향이 클 것이다. 


성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건강한 방법은 분명히 있다.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한다면 성적인 긴장감은 확연히 낮아진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뭔가를 할 때 '집중'할 것을 강요한다는데 있다. 학교에서는 아예 공부를 더해야 한다며 체육시간을 없앤다고 하지 않나? 그리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를 건강하게 풀 수 있는 방법이나 취미생활을 권장해야 하는데 그런 활동을 하면 '쓸데없는 짓하지 마라'든지 '지금 네가 그걸 할 때냐'라는 피드백이 오고 경쟁하는 사람들은 경주마처럼 그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향해 돌진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을 조성한다. 그런 압박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면 억눌렸던 것들이 변태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두 번째, 남자들에게 강요되는 남성성

그리고 사실 우리 사회는 '남성성'에 대해 굉장히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소심한 사람, 고민이 많은 사람, 몸이 왜소한 사람, 목소리가 가늘거나 톤이 높은 사람, 뭔가를 주도하기보다 따라가는 것이 편한 사람에 대해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한다. 그리고 조금 '남자다워져라'라고 한다. '남자다움'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남녀관계에 있어서 그 '남자다움'은 무엇을 의미하나? '박력 있게' 주도하는 것? 그런 이미지들이 각인되다 보면 '남자답게 행동하겠어'라는 결정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강도가 강해지고 강함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갈망하게 되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현상들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서 '아니 남성성이란 게 그런 남성성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하는 이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맞다. 그런데,  남성적일 때만 남성적이고 안 그럴 때는 가려서 안 그래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자들에게 '귀여울 때 귀엽고 섹시할 때는 섹시해야지'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 말이다. 


특정한 남성성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같은 남자라 해도 성장환경, 타고나는 성향 등으로 인해서 조금 덜 공격적인 사람도 있고 훨씬 더 섬세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다름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판단받을 것이 아니라 다름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세 번째, 남녀 간의 이해 부족과 소통의 부재

이러한 스트레스와 남성성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다면, 이성이 도구가 아니라 사람임을 인지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다면 그나마 괴물들이 최소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브레이크가 되어준 것은 사실 이 부분이었다. 단 한 번도 남녀가 공존하고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없고, 때로는 여사친들에게 언니처럼 취급당하면서 통상적인 남자들보다 조금은 이성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경험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한 걸음 더 나가지 않을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야동을 접하더라도 가학적이거나 변태적인 영상은 애초에 접근조차 하지 않게 해 줬다. 그러다 보니 군대에서 그런 영상을 선임들이 틀었을 때 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상태로 그 시간을 버텨야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남중, 남고, 여중, 여고가 여전히 존재하고 남녀공학인 경우에도 합반이 아니었던 학교들이 많았던 (지금도 그런 학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공부에 방해가 되니 이성 간에는 애초에 만나지도 말라는 사람들이 21세기에도 존재하는 나라.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예 연애를 하지 말라는 나라.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성인이 될 때까지 이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남녀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면을 알지 못하면 그에 대한 '지식'을 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에 대해서 '공감'을 할 수 있을까? 그 내용이 이해되고, 수용되고 소화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에만 내몰리고 경주마처럼 달리기를 강요하고 승자와 패자를  항상 가리고 줄 세우는 사회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남녀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신들 중심으로 자신과 상대의 성을 이해한다. 일방적인 방법으로. 남녀 간의 소통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남혐과 여혐이 난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네 번째, 성적인 부분에 대한 억압과 그에 대한 반작용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 극도로 보수적인 듯하지만 사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개방적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극단적인 성향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 도 아니면 모,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성적인 문제가 왜곡되는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스킨십과 성적인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아름다울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성적인 부분에 대한 얘기가 여전히 터부시 된다. 아니, 그나마도 논의가 되는 것은 그렇게 터부시 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에 대한 내용이거나 [쾌락]적인 부분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적인 것에 [쾌락]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부분이 집중적으로 강조되다 보니 사람들은 더 큰 자극을 통한 더 큰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이는 인간은 [쾌락]을 통한 자극에 적응하게 되고 그 자극에 적응하고 나면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 남성성으로 인지되어 있는 남자들의 경우 이것이 '상대의 대한 폭력과 억압을 통한 더 강한 자극'으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성적인 것에서 육체적인 자극을 통한 [쾌락과 즐거움]은 부수적인 효과여야 한다. 그 자극은 육체적인 접촉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교감에서 시작되어서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교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되어야 하고, 그러한 자극은 말초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강한 [육체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관계와 스킨십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더 강한 정서적인 교감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부분이 강화될수록 성적인 관계에서 느껴지는 쾌락과 즐거움도 더 풍성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관계]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설명한 방식의 스킨십은 사실 [쾌감]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스킨십의 [과정]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결과만 내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렇다 보니 스킨십에 있어서도 [쾌락]이라는 목표와 결과만 달성이 된다면 그 수단과 방법은 무시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괴물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텔레그램에 있던 이들을 모두 처벌하면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문제가 뿌리 뽑힐까? 성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이런 문제가 사라지고 모두 예방이 될까? 


그들을 처벌하는 것도 성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조치들은 기본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처벌을 통해 무엇인가를 통제하려는 것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공포정치의 일종인데, 공포정치가 무엇인가를 성공적으로 차단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정치가 강화될수록 인간은 더 치밀하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서 더 은밀한 곳에서 그 일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조치들은 단기적인 처방이다. 질병을 치료할 때는 단기적인 처방과 장기적인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여성단체들도 단순히 '여성 피해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 사회의 '사회적 문제'임을 인지하고 더 근본적인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방안들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만약 여성단체들이 '가해자들이 가해자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의 피해자임을 이해한다'라고 말하면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변화를 주장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햇볕정책'이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필요하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묘하게 '남자들도 피해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가해자로써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행위는 어떠한 논리나 맥락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억압적인 구조의 피해자'는 그 특정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의 피해자'를 의미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건 어쩌면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했다고 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자비만큼이나 엄청난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 걸음을 나가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이 논의의 구조를 계속 [남자 vs. 여자] 그리고 [남자들은 다 잠재적 범죄자이자 가해자]로 가져간다면, 단기적인 처방은 내려질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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