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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김 Mar 24. 2019

나는 그때 왜 회장님 앞에서 손 들지 못했을까?

Photo by Marcos Luiz Photograph on Unsplash


지금은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사실 전 직장생활을 국내 그룹의 신입사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룹공채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동기들과 함께 합숙 훈련도 받고 한 달 동안 본사에 출퇴근하면서 신입사원 교육도 받았습니다. 한 달 교육이 끝나가자 마지막 날엔 그룹 회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강의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룹 회장님이라면 그룹 전체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며 오너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말 그대로 조직 내 지존이셨습니다.


당일이 되자 신입사원이 모인 강당에는 다른 날과는 다른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선 인사팀은 신입사원들에게 회장님이 오셨을 때 취해야 할 예절과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할지에 대한 교육을 했습니다.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인사팀은 상식선에서 생각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냐는 반문으로 저희를 생각해보게 만들었고 또 선배로서 자신들의 의견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강의는 오후에 있었지만 오전 내내 공들여 주위를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강의시간이 되었습니다.  회사 강당에 신입사원들은 열과 오를 맞춰 앉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일군의 수행원들과 함께 들어오시자 신입사원들은 기립했고 회장님이 앉아 김정은처럼 손만 까딱하자 전 신입사원들은 기계처럼 자리에 착석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속에 정적이 잠시 흘렀고 회장님은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신입사원들은 눈과 귀를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누군가 신입사원을 최종 평가하는 시험에 회장님 강의 내용 중에서 몇 문제가 출제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초집중 상태였고 주위는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회장님의 강의가 저에게는 잘 안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목소리가 작은 건지, 마이크 문제인지 아니면 제 귀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집중해서 들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장님 강의에서 출제되는 문제는 못 맞히겠구나라고 포기했고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신입사원 대표가 차렷, 경례를 외친 후 회장님께서는 자리를 뜨셨습니다.
 
 “아, 너무 긴장했는지 강의가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고”,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는데” 놀랍게도 이런 대화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퍼지고 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이 회장님의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거였습니다. “왜, 우리 모두 잘 못 들었을까? 단체로 귀가 이상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회장님 목소리가 원래 너무 작으신 거 아니야?” “아냐, 맨 앞줄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그러는데 그렇게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는데?” “그래? 그런데 왜 뒤에까지 잘 안 들렸을까?” 그렇게 문제의 원인에 대해 모두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한 동료가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이런, 마이크가 꺼져있었네!”

Photo by Edwin Andrade on Unsplash


모두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아 합격된 우수한 신입사원들에게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걸까요? 왜 소리가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손들고 얘기하지 못했을까요? 왜 저는 그때 회장님 앞에서 손 들지 못했을까요? 당시는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 때문에 그냥 몸을 사리고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유는 잘 안 들린다고 손을 들었는데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입니다.  손든 저만 잘 안 들린다면 회장님 앞에서 대놓고 당신은 청력이상자를 뽑으셨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 창창한 내 직장생활에 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좋은 인상을 줘도 모자라는데 굳이 나쁜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겠죠. 두 번째는 회장님 목소리가 원래 작거나 말씀하시는 투가 웅얼거려서 알아듣기 힘든 경우입니다. 이 경우라면 정말 매우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겁니다. “왜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님 내 말투가 맘에 안 들어?” 졸지에 조직의 지존께서 작은 목소리와 웅얼거리는 말투의 소유자라는 것을 - 어쩌면 조직 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거론하지 않는 터부를 - 제가 많은 신입사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인시킨 꼴이 될 겁니다. “쟤가 회장님 목소리 작다고 손든 신입사원이야?” “쟤가 회장님 말투 가지고 공개적으로 말한 애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이런 수군거림과 비난을 한참 동안 참아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전에 인사부에 불려 가서 직장생활 예의에 대해, 특히 회장님에 대한 예의에 관해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만약 마이크가 꺼져있는 것이 발견됐다면 이 강의 준비를 담당한 인사팀의 담당자는 질책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장님 강의는 며칠 전부터 공지되었고 모든 신입사원이 오전 내내 만반의 준비를 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사소하지만 마이크를 켜지 않아 그동안 준비한 노력을 낭비하게 만들었다면 질책받을 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한 선배인데 사소한 실수를 내가 밝혀서 굳이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그 당시 저를 비롯한 신입사원들의 손을 막았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가 근무할 당시 누군가 손들고 문제를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문제를 제기했을 때 얻는 이익보다 부담해야 하는 위험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로 낙인찍히지 않을지 고민해야 하고, 문제제기로 인해 곤란해지는 사람들이 생기지는 않을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윗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더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은 흐르고, 머뭇거리다 문제 제기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회사의 중요한 사업과 관련되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요? 예를 들어 새로 출시하는 신제품에서 문제를 누군가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은 신제품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회장님의 심기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경쟁사보다 하루라도 먼저 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회사의 공적이 되는 건 아닐까요? 무엇보다 신제품 출시를 위해 고생한 동료들의 차디찬 시선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머뭇거리다 시간은 흘러가서 문제가 있는 채로 신제품은 출시될 겁니다. 만약 그 문제가 신제품 출시를 늦춰야 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면 회사는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상명하복 질서 내에서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조직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는 법입니다. 이런 조직문화는 빠른 의사결정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저가로 생산해야 했던 시기에는 매우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와 콘텐츠가 중요시되고 창의와 혁신이 중요한 시기에는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시절 경험했던 조직문화는 지금도 많이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회장님에 대한 예우도 중요하지만 일렬로 도열해 박수를 치고, 회장님이 한마디 하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임원들도 군말 없이 받아 적기만 하는 문화에선 누구도 쉽게 손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런 문화에선 아무리 유능한 인재를 뽑고 개발해도 그들이 할 역할이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발랄한 인재들은 자신들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권리를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소비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비도덕적인 기업들을 쉽게 찾아내고 비난합니다. 투자자들은 보다 미래지향적인 조직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투자할 겁니다. 세상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그러나 되돌이킬 수 없게 확실히 변하고 있습니다.  

Photo by Headwa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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