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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Oct 08. 2019

저는 이런 남자가 있는 줄 몰랐어요.

191008

"저는 이런 남자가 있는 줄 몰랐어요."


수업 중에 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열심히 정조의 로맨스에 대해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쌩뚱맞게 저 소리를 들었다.


쟤가 방금 얘기한 '이런 남자'가 

방금 내가 얘기한 정조를 지칭하는 건가?

아니면 열심히 떠들고 있던 내 얘긴가?

아님 수업시간에 잡담하다가 내게 새로운 걸 알았다고 얘기하는 건가?

헷갈려서 말을 멈추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더니


"쌤 멋있어요!"


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으레 여고생들이 말버릇처럼 '멋있다. 결혼하자. 3년만 기다려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너무 쌩뚱 맞은 곳에서 나온 말이라 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한마디를 더 한다.


"XX이 펜 떨어진 거 쌤이 방금 주워줬자나요! 저는 그런 남자 처음 봤어요!"


아. 남자가 아니라 학생이 펜을 떨어뜨린 걸 줏어주는 교사를 처음봤다는 얘기구나. 


너무 쌩뚱맞은 말이라 X소리하지 말라고 괜히 지청구를 하고는 정조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에서 수업을 하다가 혹은 수업중에 교실을 돌다가 

학생들이 뭔가 떨어뜨리면 그냥 자연스럽게 줏어주고 가는 편이다. 

학기 초부터 쭉 해왔고 그게 별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안보는 것 같지만 애들은 교사의 행동을 하나하나 다 보고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한 행동이 변치않고 축적되어가는 것도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이 특히나 그런 행동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거다. 


교사가 단순히 지식을 잘 가르치고 전달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항상 말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한다고는 생각해왔다. 

근데 지난 8개월동안 느낀 건 시골학교일수록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회를 간접경험하는 하나의 예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즉 좋든 싫든 자연스레 '롤모델'이든 '타산지석'의 예시가 된다는 거다.


부모님이 바쁘시거나 부모님을 포함한 보호자들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재한 학생들이 많기에

이 학생들은 생활속에서 접하는 성인의 절대적인 수가 도시에 비해 적은 편이다. 

자신의 고민이나 미래에 대해 툭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친구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은 있어도 

그 상황에 맞게 어떻게 준비하고 행동해야하는지를 가르쳐줄 사람이 별로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교사뿐인 아이들도 많다. 


결국 애들은 교사를 보면서 진로를 가늠하거나 나도 저렇게 혹은 저렇게는 아니게 살아야 겠다고 판단하더라.

나 역시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고,

교사를 희망하던 학생으로서 선생님들이 수업하는 방식, 학생들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선생님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좋아서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 분이 좋아하는 책을 따라읽고 재잘대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잘 받아주셨던 선생님의 모습은 현재 내가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언젠가부터 연설문이나 수상소감에서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거창한 사람이라고 생각치 않아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라 여겼는데,

'이런 남자'의 의미속에서 선한영향력은 무슨 의미일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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