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와 인식론(2025 1학기 수업을 준비하며 단상)
서양철학의 인식론은 대개 데카르트나 베이컨을 그 시작점으로 하여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늘 철학사에서 언급되는 유명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등등 많이 들어본 철학자들의 인식에 관한 논의들을 망라하게 된다.
이런 지식을 장황하게 듣고 있으면
그래, 너 많이 알아 좋겠다 정도의 이야기만 나올거란 생각이 든다. 재미도 없는 지식자랑. (난 재밌는데. 울 학생들에게 말이다)
울림이 없는, 감동이 없는,
철학자 이름만 나열된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나는 최근 인식론 수업 준비를 하면서
새삼 다시 깨닫고 있다.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다.
근대 철학자들은 인식을 통해 세계의 실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그들의 논증은 실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다. 중세시대는 끝이 났고 새로운 시대에,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의 힘으로 모든 만물의 실재성을 확고히 하고,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한 수호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회의주의자들의 기상천외한 주장에도 흔들리지 않을 세계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를 어떻게 아는지를 그 인식의 과정까지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벤져스다. 이 지구와 인간, 우리의 세계를 지켰다.
감각과 인상과 관념과 추론과 직관과 같은 인식론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의 무기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근대철학, 인식론은 중요하다.
챗GPT가 우리의 인식을 대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세계에 대한 관념데이터를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순간 세계는 실재성을 잃는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정보가 무한히 생성된다. 가상은 인간을 가상세계로 인도하고 인간은 인식의 객체가 된다. 본디 인식 주체는 사유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유를 인공지능에게 의존한다면, 실재성을 확보하는 사유주체가 사라진다. 인공지능은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성은 다시 회의주의자의 손에 넘어가고 극단적 주관성에 의한 유아론과 편향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분열이 불보듯 뻔하다. 가짜뉴스와 확증편향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무서운 빌런, 타노스다.
베이컨의 우상론 또한 인공지능 문제에 큰 시사점을 준다.
왜 종족의 우상을 보지 못하는가?
동물을 인간중심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이제는 AI를 인간중심적으로 본다.
AI가 허상의 정보를 생성하여 헛소리를 할때
그것을 왜 창의력이라고 이름붙여 칭송하는가?
AI는 창의력을 발휘한게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인식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기계를 그렇게 봐준거다.(기계에 그러한 술어를 붙여준거다) 기계가 원래 창의력이라는 속성을 가진게 아니다.
나는 인공지능에 붙여진 과다한 인간중심적 술어를 거둬들일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그들을 어떤 술어로 봐줄지에 따라 그들은 다른 존재가 될 것이다.
인식의 주체도, 명명의 주체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디 21세기 인간들이. 서양 유럽의 철학자들이 간신히 지켜낸 인간의 주체성과 실재성을 잃지 않길.
난 역시 .. 코기토가 좋다. 코기토, 에르고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