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스태터와 상데의 『사고의 본질: 유추, 지성의 연료와 불길』을 읽고
이 책은 인공지능을 다룬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또 다른, 새로운 번역서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던 프랑스 심리학자 ‘에마뉴엘 상데’와 함께 쓴 이 책은, 언뜻 보기엔 그의 주제(인공지능, 괴델과 수학체계, 그의 전공인 물리학…)라고 얘기하기 좀 어려운 ‘유추’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쓴 책이다. ‘유추'하면 우리는 무엇이 떠오르는가? 직유법(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법(~와 같이), 활유법, 의인법 같이 시론이나 문학 이론에서 일컬어지는 여러 ‘법’들, 혹은 유비추리 등의 논리학 같은 것? 우리의 사고가 너무 고등학교 과정에 제한되어 있는 지 모를 일이다만, 이들이 말하는 ‘유추'라 함은, 시론에 관한 것도, 언어학적인 주제도, 고등학교 국어에 나올 만한 주제도 아니다. 이들은 유추가 언어를 넘어 우리 사고와 인지의 중추에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음을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지과학에서 다룰 법한 관점으로 ‘유추’라는 사고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자, 수능에 단골로 출제되었던 은유와 직유의 차이점(‘~와 같이’가 붙느냐 마느냐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들) 같은 것은 잊어 버리자. 모든 언어적 유추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비언어적인 유추도 존재하고, 그 또한 언어적 유추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수학과 과학 이론도 유추로 인해 이루어지며, 아예 우리 사고 과정 자체가 ‘유추’라는 기제가 없었으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유추 없인 생각하지 못하는 생물에 불과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참새를 ‘새’라고 말하는 데 어디에 유추가 있는가? 참새는 분명히 새이고, 이것은 유추라기보단 그냥 범주화일 뿐이다. 참새는 비둘기, 오리, 닭 등과 같이 ‘새’라는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참새’같은 것보다 ‘펭귄’같은 동물을 새라고 생각하는 데 좀 늦은 반응을 보였다. 펭귄은 왜 새인가? 어느 누구도 펭귄을 새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참새보다 뭔가 ‘새-같음’이 좀 떨어질 뿐이다.
이 범주화의 경계가 칼로 자르듯이 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 저자들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대개 ‘펭귄’은 떨어지는 칼날의 ‘새 맞음’ 쪽에 가까스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경계는 뿌연 쪽에 가깝다. 갈매기 동상은 어떤가? 익룡은? 독수리의 그림자는? 만화에 나오는 카나리아? 달걀 안의 병아리는? 죽은 지 50년 후에 녹음기에서 재생되는 나이팅게일의 노래? 이런 범위를 확장하다 보면 인공물인 비행기 또한 칼날의 ‘새 아님’ 부분 쪽으로 들어갔다는 명확한 사실 조차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는 확장된다. 이들의 진정한 목표는 언어를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이 개념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개념은 정해진 게 없으며, 어떤 특별한 상황에 닥쳤을 때 완벽히 동일한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상황들을 묶어서 비슷한 단어들로 대체되어 표현된다. 그러나 완전히 동일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해서 그 능력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비슷한 상황 상황들을 ‘다리를 만들어’ 묶는 무의식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holic’이라는 단어는 원래 ‘Alcohol’이라는 전문 용어가 술을 일컫는 용어로 범주 확장이 일어난 후에, ‘술 중독자’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ic’을 붙인 ‘Alcoholic’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조어법 따위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hol-ic’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개념이든 공통적인 것만 있으면 연관을 시키는 버릇이 있다. 사람들은 무엇에 중독된 사람을 그냥 XX-holic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행동하지만 그 목표가 술이 아닌 일일때, 그 사람을 workaholic이라고 불렀다. 동일한 조어법은 계속되어, shopaholic, chocoholic, sugarholic, sexaholic이 생겼다. 이것이 저자들이 ‘유추의 다리’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굳이 유추가 모든 사람이 합의해야 하는 ‘언중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이 자신만의 유추를 가질 수 있으며, 이로써 개인적 유추는 언어로조차 말하기 굉장히 힘들어지는 순수한 개념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어떤 채식주의자가 어린 아이에게 왜 이미 죽은 고기일 뿐인 햄버거를 먹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슈퍼마켓 선반에 있는 음료수 캔을 꺼내면 바깥에서부터 차례차례 미끄러져 내려오는 비유를 들었다. 물론 이를 ‘컨베이어 벨트식 축산업’ 따위의 용어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슈퍼마켓 캔과 ‘컨베이어 벨트식 축산업’의 유추의 다리를 건설한 사람은 그 혼자 혹은 그와 그러한 얘기를 나눠본 몇몇에 지나지 않다. 이 유추를 용어로 표현하자는 어떠한 언중의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유추는 비언어적 개념에 속한 개인적 유추이다.
이러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유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무의식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 자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한다. 유추는 너무나 자동적이라,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 출근길에 멍하니 ‘저 사람은 누구와 닮았네’, ‘어제 영화는 마치 안드로메다 같았어’, 아니면 언어적으로조차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망상은 그냥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며, 그 안에 복잡하게 구조화된 무의식 영역이나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까지 유추를 자동적으로 끊임 없이 생산해 내고 있는지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이유와, 그 신경적 작동 원리이다. 아마 딥러닝과 같은 Neural Network 구조에 그 해답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든다. 왜냐하면, 충분히 훈련된 네트워크는 어떠한 사진을 보여주면 오히려 초코칩 쿠키를 치와와로 착각하거나, 과하게 개의 이미지를 인식하여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유추하는 컴퓨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가 유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시대가 또 다시 열릴까?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컴퓨터는 이미 나와 있다. 유추가 가능한 컴퓨터란, 시를 지은 후에 그 시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거나,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감상을 작성하는 놈일지 모른다.
“아, 제가 몇 년 전 초코칩 쿠키를 치와와로 잘못 본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그 때문에 생각해 낸 줄거리로, 계기판에 달린 스위치를 과자로 착각해 실수로 눌러 버린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그 스위치란 바로 핵 미사일 발사 스위치였던 것이죠.”
저자의 책에선 이러한 인지적 매커니즘이나 인공지능 이야기는 삼가고 있지만, 분명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괴델, 에셔, 바흐」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아닌가. 유추하는 컴퓨터에 대한 다음 저작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