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없을 때도 늘 사진을 찍어왔다.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그렸으며 머리로는 상상했다. 학교까지 통학할 때는 늦은 중2병 앓이로 항상 음악과 함께였는데, 습관처럼 혼자 말도 안 되는 뮤직비디오의 장면을 만들어 눈앞에 그리곤 했다.
1호선을 타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휴대폰만 바라본다.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들어, 휴대폰 삼매경 행렬에서 빠지기로 한 뒤로는 늘 전자책을 챙겨 다녔으나 오늘 하필 가지고 나오는 걸 잊었다. 멍 때리며 앞사람 발만 쳐다보고 있는데, 창을 통해 지는 해가 건물과 만나 지하철 내부로 그림자를 내렸다. 맞은편 앉은 이들의 머리카락 색 켈빈 값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창밖의 풀들은 한결같이 석양 색에 아른아른 춤췄다. 중천은 평소보다 연둣빛을 한 방울 더 머금은 모양새였다. 눈으로 이 모든 색을 기억하기로 했다.
가끔은 카메라 없이 세상의 온전한 색을 눈에 가득 담을 시간이 있어야만 한다. 카메라가 없던 때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