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지 않습니다, 멤버십 구독은.
장담합니다.
멤버십 구독자가 되더라도, 돈 주고 볼만한 콘텐츠와 조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멤버십 구독 버튼>을 누르지 않기를 조언합니다.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저의 탈고된 글들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의 서랍>에서 초벌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완결성을 갖춘 작품들은 <멤버십 글>이 아니라 <전체 글>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멤버십 구독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작곡가가 종이 위에 곡을 쓰고 나서 그 종이를 서랍에 넣습니다. 그 음악은 존재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려면 그 음악을 연주할 사람에게 줘야 합니다. 이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음악을 들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음악 예술에만 속하는 극적인 이행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묶어줄 기적을 필요로 합니다. (엔니오 모리코네, '엔니오 모리코네의 말' 중)
브런치스토리에는 <작가의 서랍>이 있습니다.
작가들이 틈틈이 글을 써서 넣어두는 임시 보관소 같은 곳입니다. 서랍은 경상도 말로 <빼다지>라고 부릅니다. 추측건대 빼고 닫아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말로 돌아가 과연, 서랍 속에 넣어둔 곡처럼 작가의 글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읽을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한 글을 '글'이라 해도 되는 걸까요? 아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고민과 사색을 통해 비만과 다이어트를 반복하고 있는데 '글'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모호한 정체성들이 저의 빼다지에 가득합니다.
멤버십 콘텐츠로 <작가의 서랍>을 오픈할까 생각했습니다.
멤버십 구독자는 가족과 같은 마음일 테니까 정돈되지 않아 지저분한 작가의 서랍을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정식 오픈되기 전부터 만들어진 <멤버십 메뉴>가 자꾸 눈에 거슬렸습니다. 무엇으로든 얼른 채워 놓아야 속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멤버십 콘텐츠를 따로 준비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고민을 조금 하다가 이미 있었으나 보여주지 않은 것들, 지극히 개인적이라 보여주기 어려운 허접한 것들을 멤버십 식구니까 보여줘도 되겠다는 엉뚱한 용기가 났습니다. 일단 보여주기로 하되, 가급적 아무도 보지 않도록 멤버십 구독을 적극 만류하면 어떨까. 볼품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되, 누구도 오지 않게 말리기. 문은 열어 놓되, 입구에 바리케이드 치기.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제 서랍은 좀 지저분합니다.
나름 정리정돈을 한다고는 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에 가끔 나오는 폐지수집 할머니 방 같습니다. 원래 서랍은 지저분해도 되는 겁니다. 책상 위만 깔끔하면 되었지, 보이지 않는 서랍 안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책상 위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거나, 밖으로 드러내기 부족한 무엇들은 당연히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겁니다. 마치 동굴 속에서 깨우치기 전에는 못 나오게 입구를 막아버리는 그 머시기 수행법처럼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은 캄캄한 서랍 안에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 속에는 초벌구이 상태의 그릇들, 재벌구이를 기다리고 있는 유약도 안 바른 미완성의 문장들과 사진들이 있습니다. 탈고되지 않았으므로 언제든 변화무쌍이 가능한 럭비공 같은 초고들입니다. 멤버십 구독을 하더라도 고작 이런 것들만 관람 가능할 뿐입니다. 여기 서랍 같은 가마에서 재벌과정을 거쳐 완결성을 입힌 작품들은 <멤버십 글>이 아니라 <전체 글>에 공개되니까요. 그러니 멤버십 구독해도 별 게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한 서랍을 엿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서랍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살면서 생각이 떠오르면 재빨리 몇 줄의 문장으로 다듬어 서랍 속에 넣어 둡니다. 때로는 생각을 얻기 위해 책 속의 문장들을 뒤지고 기억해 내려 애쓰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름다움의 눈을 크게 뜨려고 애쓴 적도 많습니다. 어찌어찌 비슷한 재료가 보이면 주섬주섬 채집하여 보충을 합니다. 일상을 찍은 사진들 중에 어울리는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거나, 딸이 그린 그림 중에 어울리는 건 없는지도 확인해 봅니다. 그 과정에서 상전 같은 따님에게 굽신 굽신해야 겨우 그림 한 점 얻을 수 있습니다. 치사하고 비굴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년필 글씨를 연습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랍 속에서 지들끼리 섞이다 솜사탕 모양으로 뭉쳐지면 어엿한 글감이 됩니다. 이제 서랍 바깥세상을 고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홀로 선다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발행'이라는 이름의 용기.
발행 버튼은 우주선 발사 버튼 같은 겁니다. <발행>이라는 건 서랍 속에서의 긴 잉태의 시간을 끝내고 나의 분신을 세상 밖으로 내던지는 것입니다. 단, 세상을 살아갈 무언가를 쥐어주고 내보내야 합니다. 코흘리개는커녕 걸음마도 떼지 못한 젖비린내 풀풀 나는 글을 발행하는 건 용납되지 않습니다. 완결성입니다. 작가라면 함부로 글을 발행하면 안 된다는 다짐이 곧 작가로 인정해 준 브런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집을 키운 글이 서랍을 탈출할 정도로 자랐고, 세상 밖에 나가 무슨 일을 하든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마음이 서면 비로소 발행 이후의 모습을 검증해 봅니다. 태블릿으로 읽을 때 거슬리는 건 없는지, 폰으로 볼 때 부담스럽지 않은지 그리고 모니터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검토합니다. 서랍을 떠나는 글에게 예쁜 옷을 입혀 주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멤버십 구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의 내용만큼 형식과 형태도 중시하는 편입니다. 보기 좋은 떡처럼, 보기 좋은 글이 저는 예쁩니다. 보기 좋게 만드는 건 가독성과 이해력을 높이는 작업입니다. 읽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일기나 낙서 수준의 어리고 연약한 글을 저 흉포한 세상에 내던질 순 없습니다. 저는 어디에 내봐도 살아남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랍 밖 밀림에서 맹수들 가운데 우뚝 서는 생명력 강한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금 더 작가의 서랍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큐베이터 같은 서랍 안에서 제대로 성장할 때까지 단련하며 완결성을 익혀야 합니다. 그러니 멤버십 구독을 해봤자 이러한 연습생 신분의 글들만 더 볼 수 있는 겁니다. 굳이 멤버십 구독을 권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냥 평소와 같이 서랍 밖으로 나온 건장한 글들을 감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문 반복>
장담합니다.
멤버십 구독자가 되더라도, 돈 주고 볼만한 콘텐츠와 조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멤버십 구독 버튼>을 누르지 않기를 조언합니다.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저의 탈고된 글들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의 서랍>에서 초벌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완결성을 갖춘 작품들은 <멤버십 글>이 아니라 <전체 글>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멤버십 구독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작곡가가 종이 위에 곡을 쓰고 나서 그 종이를 서랍에 넣습니다. 그 음악은 존재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려면 그 음악을 연주할 사람에게 줘야 합니다. 이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음악을 들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음악 예술에만 속하는 극적인 이행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묶어줄 기적을 필요로 합니다. (엔니오 모리코네, '엔니오 모리코네의 말' 중)
브런치스토리에는 <작가의 서랍>이 있습니다.
작가들이 틈틈이 글을 써서 넣어두는 임시 보관소 같은 곳입니다. 서랍은 경상도 말로 <빼다지>라고 부릅니다. 추측건대 빼고 닫아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말로 돌아가 과연, 서랍 속에 넣어둔 곡처럼 작가의 글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읽을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한 글을 '글'이라 해도 되는 걸까요? 아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고민과 사색을 통해 비만과 다이어트를 반복하고 있는데 '글'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모호한 정체성들이 저의 빼다지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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