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텀블러 속의 하루치 피로

텀블러

by 라이트리
10 텀블러.png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텀블러에 로즈마리 워터를 가득 채운다.
커피 대신,
요즘은 그냥 시원한 차가 좋다.
속이 덜 부담스럽고,
왠지 그 청량함만으로도
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뚜껑을 닫을 땐
나도 모르게 마음도 같이 조여 본다.
오늘 하루,
제발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나 자신에게 약속하듯.


“오늘은 이거 마시면서 좀 천천히 숨 쉬자.”
“시원한 한 모금쯤은 나도 누려보자.”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늘 그렇듯 예상보다 더 빨리, 더 정신없이 흘러간다.
메신저는 쉴 틈 없고,
회의는 왜 이렇게 많은지.
할 일은 아직 파일 속에 가득한데
시간은 벌써 오후를 넘긴다.


점심은 겨우 씹어 삼키고,
소화도 안 되는데 일은 또 몰려온다.
머리는 돌아가고, 속은 부글거리고,
웃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방전 5분 전.


그 사이,
내 텀블러는 책상 한 켠에 조용히 놓여 있다.
나를 위해 준비했던 그 청량함은,
하루 종일 나에게 단 한 번도
선택받지 못한 채
말없이 나를 기다린다.


“이거 마시긴 할까?”
“그래도 아직 시원할까?”


그런 생각이 스치지만,
손은 늘 키보드로 먼저 간다.
다음 일정, 다음 답변, 다음 보고서.
‘나중에 마셔야지’는
하루 중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되었다.


사실 알고 있다.
그걸 마시는 데 30초도 안 걸린다는 걸.
근데 왜인지 그 30초가
가장 아까운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고,
퇴근 준비를 하면서
텀블러 뚜껑을 열어본다.
청량함은 사라졌고,
냉기도 반쯤 사라져 있다.
차갑지도, 완전히 덥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미지근함.


그 상태가,
지금의 내 상태 같다.
뭔가를 하긴 했는데
딱히 잘했다고도,
완전히 망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하루.


괜히 울컥함이 밀려온다.
내가 나를 위해 준비했던 게
하루 종일 무시당했다는 느낌.
그 무시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


텀블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바빴다는 것도,
그래서 생각보다 많이 나를 놓쳤다는 것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마시지 못한 차가 아니라,
내가 놓친 쉼,
내가 미룬 한숨,
내가 외면한 나였다.


내일 아침,
나는 또 이 텀블러를 채울 것이다.
이번엔 마셔야지. 이번엔 진짜.
다짐하면서 또 채우겠지.
그리고 또 못 마시고 하루가 지나가도,
그건 아마
다시 한 번 나를 챙기고 싶었다는 마음의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텀블러를 닦을 때마다
나는 내 마음도 같이 닦이는 기분이 든다.
이 청량함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챙기려는 의지니까.


비록 마시지 못했어도
텀블러를 들고 나섰던 아침의 나는
그래도 나를 조금 더 아껴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keyword
이전 10화닦아도 닦아도 흐릿한 건, 안경이 아니라 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