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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린 마음은 오래 젖는다

빨래

by 라이트리

비가 오는 날에 널어둔 빨래를 보면 ,

나는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습한 공기, 눅눅한 냄새,

마르지 않은 천들의 축축함이

그대로 내 마음에 들러붙는다.

아무것도 잘못한 건 없는데,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게 꼭,

한 번도 다 털어내지 못한

어떤 감정들과 닮아있다.


나는 ‘빨래’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감정’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때가 타면 씻어내야 하고,

삶고, 헹구고, 짜고,

그다음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

햇살에 말려야 한다.

그 과정이 없다면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속은 여전히 눅눅하다.


감정도 그렇다.

속상한 일이 있었다면

소리치든, 털어놓든, 시간을 두고 말려야 한다.

그게 되지 않으면

겉으론 괜찮아 보여도,

속은 곰팡이처럼 서서히 상해간다.


비 오는 날,

나는 그런 ‘못 말린 마음’들을 떠올린다.

예전의 어떤 대화,

마무리되지 못한 이별,

아무도 몰랐던 서운함 같은 것들.

이미 지나갔지만,

어딘가 젖은 채 남아 있는 것들.

그것들은 딱히 나를 아프게 하진 않지만,

비가 오면 꼭 다시 꺼내져서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리고 그 무게는,

옷가지 몇 개가 널려 있는 빨랫줄처럼

조용히 나를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 무게를 덜어내려면,

어쩌면 이제는 꺼내어 다시 말려야 하는 걸까.

해가 나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펼쳐 바람에 흔들어야 하는 걸까.


살다 보면 마음이 젖는 날이 있다.

특별히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하루하루 쌓여가는 피로,

조금씩 밀려나는 감정들,

말하지 못한 말들 속에서

마음은 눅눅해진다.

그리고 그 눅눅함은

문득문득 비 오는 날만 되면,

나를 더 무겁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가끔,

빨래처럼 마음도 털어내고 말릴 줄 알아야 한다.

지나간 슬픔을 꺼내어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쌓인 감정을 조심스럽게 펼쳐 놓고,

말 없이 하늘에 기대어 놓을 줄 아는 용기.

그게 어쩌면

우리를 덜 무겁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다시 빨면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다시 말리면 된다.

햇살이 나지 않으면,

바람이라도 기다려보면 된다.


비 오는 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마르지 못한 마음도 괜찮다고.

언젠가는 해가 나고,

그 마음도 바싹하게 마를 날이 올 거라고.


그러니 오늘도,

젖은 마음을 조용히 펼쳐본다.

말리진 못해도,

꺼내어 놓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제는

그 젖은 마음을 꼭꼭 숨기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도,

나만큼은 내 마음의 무게를 알아봐야 하니까.


말릴 수 없는 날엔 꺼내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조용한 용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엔 바람이 불고

언젠가는 햇살이 들어오고

그 젖은 마음도 어느새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조금은 덜 무거워져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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