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
코에 남은 눌린 자국이
오늘 하루의 무게였다는 걸.
-돋보기의 혼자말
작업을 끝내고 안경을 벗었을 때,
거울 속 내 얼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눈빛도, 흰머리도 아닌
코 옆에 남은 두 개의 눌린 자국이다.
딱히 아픈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짠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걸 보면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는지가
한눈에 느껴진다.
아무리 가벼운 안경 프레임이어도
하루 종일 얹혀 있으면
무게가 남는다.
그 무게는 숫자로는 안 남지만
자국으로는 남는다.
눈에 잘 띄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신경 쓸 만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안다.
그건 분명 하루의 ‘흔적’이라는 걸.
무게가 날 누르고 있었고,
그걸 내가 나도 모르게 견디고 있었던 거라는 걸.
특히 오늘같이 유난히 바빴던 날,
모니터 앞에 오래 앉아 있었던 날,
회의하다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던 날,
긴장해서 안경 다리에 자꾸 손이 갔던 날엔
그 자국이 더 깊어진다.
그리고 그런 날은
안경을 벗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따라 나온다.
"후…"
사람 마음도
안경 자국이랑 비슷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내 안엔 분명 뭔가가 눌려 있는 흔적.
소리 내지 않아도,
티 내지 않아도,
그 흔적이 조용히 마음에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작은 한 줄짜리 무게가
코 옆에, 눈 밑에,
그리고 마음 어딘가에 눌려 있다.
그 자국은
누가 대신 닦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때때로 그 자국조차 없으면
내가 하루를 잘 살아낸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안경을 벗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그 자국을 바라본다.
사라지기 전에
살짝 손가락으로 눌러도 보고,
그 아래 숨은 하루의 감정들을
조용히 꺼내 본다.
“아, 오늘은 이런 얼굴이었구나.”
“오늘도 꽤 버텼네.”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그 흔적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혹시 내 주변 사람들도
각자의 얼굴 어딘가에
자신만의 ‘눌린 하루’를 달고 있진 않을까?
눈으로 보이는 건 없지만
마음 어딘가에 작고 깊은 자국이 남은 사람.
웃고 있지만 실제론 지쳐 있는 얼굴.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괜찮지 않은 눈빛의 얼굴.
그럴 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작은 자국 하나쯤은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보이지 않아도,
그냥 지나쳐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만큼 오늘을 살아낸 사람’이라는 걸
알아봐주는 마음.
그러니까 다음에
누군가의 코 옆에 남은 자국을 보게 된다면,
혹은 누군가의 얼굴에서
조용한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냥 한마디쯤은 해보자.
“오늘 많이 고생했구나.”
“그 자국, 아무도 몰라도 난 안다.”
그게 누군가에겐
하루 중 가장 부드러운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까.